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10장 대량살상무기 (민수기 22~24장)
 선지자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막대기로 나귀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던 바로 그 때, 그 나귀는 왜 자신을 때리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가 나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생각하기 위해 멈추는 대신, 발람은 이렇게 응수하였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민 22:29). 오, 정말이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칼을 들고 기다렸으며, 그는 학대하고 있는 자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172.2)
 그에게 비열한 짓을 하고 있다는 발람의 비난에 맞서서, 나귀는 이렇게 반박하였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30절). 그래서 입술로부터 나오는 저주로 국가 전체를 파괴하기 위하여 벌이를 나선 영향력 있고, 명석한 발람이 나귀와의 논쟁에서 지고 말았다! 나귀는 선지자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발람은 그렇지 못했다. 나귀는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신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귀는 총명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응하였다. 발람은 완고하게 반응하였다. ∙∙∙ 나귀처럼! 우리는 그가 금방이라도 그 짐승처럼 구슬프게 울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172.3)
 발람과 그의 나귀가 역할을 뒤바꾼 이 아이러니하고 통렬한 풍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우습고도 재미있다. 여하한 이유로도 그분의 백성을 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하나님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놓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강력한 기별을 보낸다 (그와 모르드게가 역할을 바꾸자, 하만이 웃음거리가 된, 에스더 6장을 참조하라).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신원의 축복을 그들에게 위에 놓으셨다 (민 6:22-27 참조). 그래서 그들을 저주하거나 공격하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173.1)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여시사 발람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하셨을 때, 그는 고꾸라졌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나귀를 때린 것을 질책하였고 그 동물이 그의 생명을 구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주셨다(민 22:31-33). 나귀를 아주 잔인하게 다룸으로써, 발람은 무심코 그의 품성의 악한 면을 드러내고 말았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 12:10). 생명은 신성하며, 동물을 소중히 여기고 양육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똑 같이 할 공산이 크다. 반대로 동물을 다치게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발람은 나귀가 자신의 탐심을 방해했기 그를 때렸다. 또한 그는 수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해서도 괘념치 않았다. (173.2)
 발람의 나귀는 이렇게 항의하였다.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아마도 이 기적의 말이 담고 있는 원칙은 사람들이 서로를 취급하는 방법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는/일하는 배우자/종업원이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일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여 신실한 우리의 조력자들을 안 좋게 다루는 대신에, 그들을 믿어주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우리가 놓친, 그들의 행동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청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174.1)
 이제 들켜버린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선선히 고백하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민 22:34). “(만약)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질문이 있는가? 무슨 뜻으로 “만약”이라고 하는 것이지? 발람은 그야말로 그저 돌이켜 집으로 갔어야 했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짜로 모압으로 가고 싶어했다. (174.2)
 놀랍게도,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이 여행길을 계속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용하면서, 이렇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35절; 20절 참조). (174.3)
 기브롯 핫다아와에서의 산더미같은 메추라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민 11장), 그가 원하던 것을 얻는 것은 탐욕적인 발람에게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가능하면) 그들을 가르치고 시험하기 위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계속 진행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과정에서 그분은 발람의 저주를 무효화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드러내실 수 있었다. (174.4)
 예상치 못한 축복들
 그의 고객 발락을 만나자 발람은 왕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지라도 자신은 책임이 없음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 그것은 의사가 환자들에게 하는 말과 다소 비슷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장담할 수 없습니다.” (175.1)
 발람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오셨고, 제가 그들을 저주하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간과 당신의 돈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바꾸실 것을?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큰 해를 입힐 수 있는 저주 말고 어떤 다른 것으로 발락이 만족할까를? 눈에 어른거리는 돈의 유혹에 사로잡힌 채, 발람은 오로지 손해가 될 뿐인 상황에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돈이 한 푼도 들어있지 않은 잭팟 앞에 있는 라스베가스의 도박꾼과 같았다. 아니면 권총의 여섯 개의 약실 모두에 총알이 장전된 상태에서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러시안 룰렛 선수와 같았다. 탐심은 흔히 사람들을 위험스럽도록 비논리적으로 만든다! (175.2)
 그 선지자는 발락의 이교적인 모압의 제사를 받아들여 참여한 듯 보인다. 그 이튿날 왕은 “바알 신의 산당”을 뜻하는 “바모쓰-바알”이라 불리는 이교 장소로 그를 데리고 갔다(40,41절). 발람은 그들의 종교예식에 참여하여 불신자들의 원칙들과 타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울리는 것은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는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확실한 배교에 빠뜨리는 미끄러운 비탈이다. (175.3)
 흥미롭게도 고고학자들은 발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일단의 고대 비문들을 발견하였다. 그것들은 기원전 8세기(이스라엘 왕정 시대 동안) 것으로 연대가 추정되며, 요단강의 바로 동쪽의 다이르 알라 유적지에서 회반죽벽들에 기록되어 있었다. 비문은 발람을 신들의 선지자로 기억하는데, 신들은 밤의 이상 가운데서 그에게 경고의 기별을 준다. 이 이야기는 그가 다신교적인 이교와 점술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이야기와의 유사점들이 두드러진다. (176.1)
 바모쓰-바알은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의 가장자리를 조망할 수 있는 고지대였다(41절). “시선이 가는 방향”을 좇아가면서 그는 그의 저주를 그들의 목표물에 조준할 수 있었다! 순조롭게 신을 불러내기 위하여, 발람은 발락에게 값비싼 여러 희생제물을 드리게 하였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방백들이 있는 곳에서 말할 한 기별을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그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발람의 게임에 협조하고 계신 듯 보였다! (176.2)
 그분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일하고 계셨다(롬 8:28 참조). 발람의 첫번째 영감 받은 말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한 발락의 요청을 다시 이야기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176.3)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 23:8). 계속해서 그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특별하고 백성들의 수효는 심히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10절). 그같이 하여 그는 자신을 의로운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였다! (176.4)
 발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발람은 면책조항을 내세웠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만을 말할 수 있었다고. 발락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였지만, 절박했다. 포기하기를 거절하였다. 아마도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진영이 덜 보이고, 그래서 전처럼 인상을 덜 받을 다른 위치라면 일이 더 잘 풀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을 비스가산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더욱 값비싼 동물들을 제물로 드렸다. (177.1)
 발락은 여러 다른 곳들에서 일들을 하면 그가 신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이교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필자와 아내가 어느 평화로운 안식일 오후 북부 캘리포니아의 숲에서 산책을 즐기려고 했던 때를 생각나게 해 준다. 우리 어린 딸아이는 내 등의 배낭 속에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날따라 거기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큰 소리로 계속 울어댔다. 나는 아내에게 하소연하듯이 제안했다. “여기서 나가서 조용한 데로 갑시다!” (177.2)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한 수 앞설 수 없다. 그분은 모든 것을 보시고 소유하신다. 어디서나. 상품권은, 어느 면으로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필요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범한 위선자들의 범법을 눈감아주시도록 유도할 수 없다(시 50:16-23). 모압 왕은 그의 친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상(中傷)하기를 원했으며, 여호와를 자신과 같은 줄로 생각하였다(시 50:21 참조-“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의 첩경은 회개하고, 참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77.3)
 발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말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 째는 간략한 경고였다. 그것을 무시하였기에, 발락은 지금 더 큰 것을 받았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인간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축복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함으로써 시작한다(민 23:19,20) 그 다음 말은 놀랄만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민 23: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온갖 끔찍한 배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여호와께서 그 모든 것들을 잊으셨단 말인가? 넓은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한 나라로서의 그분의 백성들을 용서하셨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그분은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분은 백성들을 징계하실 수 있지만, 외부인들 앞에 그들의 치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백성들은 가능한 한 그들의 공동체의 명망에 손상을 입히는 것을 피하고, 그렇게 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망에 손상을 입히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문제들과 분쟁을 그들 가운데서 해결해야 한다(고전 6장 참조). (1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