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부 시련과 유혹 (1:1-18) 3. 축복이냐, 비난이냐 (1:12-18)
 하나님을 비난함
 앞에서 우리는 peirasmos라는 단어가 “고난”뿐만 아니라 “시험”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것이 외적 고통인지 혹은 죄에 대한 내적 유혹에 관한 언급인지는 그 문맥만이 결정지을 수 있다. 이 지점까지(1:13) 야고보는 주로 외적 고난에 대해 설명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그는 그의 관심을 특별히 내적 유혹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모든 성경학자들이 그 차이점을 강조해야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적어도 얼마의 사람은 야고보가 그런 구분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George Stulac은 “야고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시험들이 이제 특별히 그의 독자들의 고난의 상황 속으로 들어왔다—예를 들어, 숨겨진 시험들이 증오를 받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복수하려 하거나, 혹은 그 시험은 그들의 경제적 고통 속에서 탐욕스러워지고 시기하게 된다”(James, 53)라고 제안한다. 비록 Stulac이 야고보서에 있는 고난에 대한 그의 설명들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지적은 시험이 고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받아들였다. (77.2)
 야고보가 여기서 꼭 다룰 만한 것은 고통받는 자의 외적 고난에 대한 대응이다. 그의 독자들이 그들의 다양한 고난을 만났기 때문에, 야고보의 도전은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는가?”이다. 그들이 만나는 고난은 아마도 시험의 기회가 되었고, 그들은 차례로 어딘가로 그 비난을 돌리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이것은 상당히 납득할 만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관하여 우리의 부모나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을 자주 비난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는 우리가 해 놓은 것에 관하여 대신 환경을 비난한다. 혹은, Filp Wilson에 의하면, 한때는 유명했던 미국인 코메디언이 “내가 그것을 하도록 만든 것은 사단이다!”는 문구를 유행시켰다. 사람, 환경, 심지어 죄 된 세력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야고보의 공동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난하여,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다”고 말하며 범위를 넘어선 듯이 보인다(13절).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속에 죄 된 계획을 가진 사람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그들을 포기하고 버리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는 아마도 그들은 단순히 그들의 상황과 싸우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역할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78.1)
 이것은 신정론에 있어서 오래된 질문—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하심과 악의 존재를 중재하려는 시도—특별히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된 문제를 제기한다: 왜 의인이 고통받는가? 마치 우리가 오늘날 에이즈, 암, 콜레라, 지진, 허리케인, 전쟁 등을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의 독자들은 왜 그런 나쁜 경험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매우 의아해 했음이 틀림없다. 흥미롭게도, 비록 이 시점이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었지만, 야고보는 이 신정론의 문제를 풀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은 듯 하다. 혹은, 아마도 그 질문이 실천적인 문제이기 보다 신학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관여하는 것에 흥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죄악을 허용하실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시험의 동인이 아님을 논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시험을 위한 근거가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78.2)
 여기에서 야고보는 많은 유대 저자들이 과거에 이미 했던 일 즉, 시련과 시험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보기를 주목해 보자. 창세기 22:1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기록을 본다. 그러나 신약 성경 이전의 문서(그러나 구약성경 이후)에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Mastema 혹은 사단이다(희년서 17:16). 희년서의 기록에서 사단은 욥기의 기사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소자로 행동한다(욥 1:6-2:8을 보라). (79.1)
 더욱 의미있는 것은 그의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려는 다윗을 시험하고 선동하는 자에 관하여 사무엘하와 역대상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기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무엘하 24:1에서 기록자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역대상 21:1에서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주로 고대 문명의 사람들은 죄를 귀신들린 힘, 우상, 혹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돌렸다는 사실의 빛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초기 이스라엘 당시(사무엘하가 쓰여졌던 때) 히브리 민족은 사건들이 마귀적인 힘에 의해 생긴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시고 시조였는데, 그것은 선과 악에서도 그러했다. 한편 갑작스런 불행이나 재난이 닥쳐올 때, 혹은 부정적인 명령이 주어졌을 때 혹, 다른 한편 축복이 부어지거나 긍정적인 명령들이 주어졌을 때 그 근원은 언제나 전능하신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대상 1장이 기록되었을 당시(바벨론 포로 이후 어떤 때), 유대 백성들은 선을 시작하고 악을 시작하는 자에 관한 새로운 안목을 계발하였다. 그것은 당시 그들에게 죄와의 어떤 연관으로부터 하나님을 방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을 선동하고 시험하는 자는 하나님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단이었다. (79.2)
 이러한 후기 저자들과 유대 사상가들과 같이, 야고보는 시련과 시험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르게 그는 다른 마귀에게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그는 정확하게 한 개인의 발 아래에서 도덕적 책임을 두었다. 이것은 아마도 개인적 책임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성서적 확신이었을 것이다. 그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4)라고 기록했을 때 말하고자 한 것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80.1)
 한 개인에게 비난을 돌리는 것에서, 야고보가 주로 “죄악된 감정”, “죄악된 성향”, 혹은 “죄악된 본성”(the yetser bara)에 대한 랍비들의 가르침과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죄를 짓도록 한 개인을 자극하는 것은 이 내적인 성향인 것이다. 어떤 오래된 성경 번역은 죄를 향한 이 내적 성향을 설명하기 위해 14절에서 욕망(lus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야고보가 성적인 의미를 가진 시험과 관련시킨 것으로 우리가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오늘날 욕망(lust)이라는 단어가 주로 성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수세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고, 그것은 단순히 어떤 강력한 욕구나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현대 영어 번역은 보통 14절에서 욕구(desir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야고보와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의 개념은 성적인 것을 넘어서 프로이드의 본능(id)과 유사한 내적 성향과 더욱 긴밀하게 관련시켰다. 그것은 “자신”(self)혹은 “자아”(ego)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ego)를 움직일 수 있고 그것은 죄로 이끌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욕구(desire)나 욕망(lust)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단어 epithumia와 같은 것에서 온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중성적인 것인지는 그 문맥에 달려있다. (80.2)
 로마서 7:7-23에서 바울이 에덴 동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죄악된 성향에 관하여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도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 절에서 바울이 “나”(I) 혹은 “자아”(ego)에 대해 그것은 영적인 자연적 욕구들에 분명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기록하기를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5-19). (81.1)
 그러나 바울의 논쟁에서 죄를 짓는 것은 “자아”(ego)가 아니라 범죄자이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이 본문에서 바울이 “죄”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야고보가 “죄악된 욕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아직 야고보의 논쟁이 죄와 내적 투쟁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시험이 있을 때 비난을 받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 개인의 자신의 죄악된 욕구이다. (81.2)
 1:14, 15에서 야고보는 죄 된 성향이 계속될 때 발생되는 것의 본질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련의 회화적이고 은유적인 단어들을 고용한다. 우선, 14절에서 그는 한 사람이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다고 말한다. Simon Kistemaker는 여기에서 야고보가 고기를 낚는 기술에서 끌어내고 있다고 제안한다. “고기가 미끼를 보고 미끼를 무는 유혹을 받는다. 고기가 미끼를 잡았을 때 그것은 갑자기 끌려져 그의 죄 없고 무지한 생명을 지불하게 되었다”(James, 49). 그러나 인간은 무지하고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에 의해 유혹받는 것이다. 야고보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비난하도록 우리에게 어떤 구실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함정이나, 유혹이나, 모함에 대한 비난은 본인의 것이다. (81.3)
 15절에서 야고보는 회화적이고 은유적인 단어를 바꾼다. 이제 죄의 진행이 인간의 생식 과정에 대한 용어로 생생하게 묘사되어진다. (물론, 그것은 14절이 침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남자나 여자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15절이 그 일의 결과로 묘사되었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착상, 부화, 형성, 번식”의 과정이 있다(Martin, 32). 그러나 야고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출생 이후에는 성숙과 죽음-재앙이 있는 것이다! (82.1)
 야고보가 그리는 물감은 어둡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그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하는 유혹과 때로는 그에 동반되는 고난에 대하여 비난받게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험을 창안하지 않으신다. 차라리 그 비난은 틀림없이 내적인 것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야고보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있는 힘—그것이 하나님, 사단, 별, 점성술이든지 간에—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부인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Julius Caesar에서 유명한 한 구절과 평행을 이룬다: “사랑하는 부르터스여, 거짓은 우리의 별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다.” 나는 하나님, 별들, 심지어 사단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비난할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82.2)
 위로부터 오는 축복들
 야고보는 이 단락(1:12-18)에 있는 부정적인 주장에 균형을 맞추어 긍정적으로 결론을 맺는다. 는 하나님이 시험의 창시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 그는 긍정적으로 이 점을 확립한다. 시험은 하나님이 고안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위로부터 오직 좋은 것(17절)만을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죄를 보내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17절)는 축복을 부인하는 것은—완전한 기만이다(16절). (83.1)
 야고보가 이 절에 “하늘의 빛들”을 포함시킨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Ralph Martin의 제안처럼 그의 독자들이 자신들은 별들의 힘과 운명론 아래에 있다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발생되는 모든 변화에 말려드는 유한한 존재와 다름없는 자로 하나님을 간주하게 될 수 있겠는가?(31). 만일 이 제안이 어느 정도 신뢰성을 갖게 한다면, 야고보는 또다시 그러한 믿음을 방해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논쟁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발광체들의 창조자이시고 우주와 자연 세계에서 발생되는 셀 수 없는 변화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어떤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 야고보는 하나님도 점성술도 운명론도 그 외의 어떤 힘들도 비난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직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르러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 (83.2)
 우리는 야고보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매우 중요한 두 단어—온전(perfect)과 변함(change)—를 너무 간과하지 말자.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진술이든지 하나님은 온전하시다는 사실로 시작하고 끝을 내야 한다. 불완전하고 죄 된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이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가 되고, 죄를 행하고, 죄를 보내시는 것은 그분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어떤 죄의 요소라도 배제하며, 그분은 인류에게 모든 선물로 축복하시는 분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 견해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온전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자가 되시며 죄악은 결코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83.3)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놀라운 선물—인간 존재의 창조—과 함께 야고보의 논쟁이 끝을 맺는다. 18절에서 우리는 15절과 대조적 병행을 발견한다. 죄 된 충동을 품고, 죄가 태어나고, 죽음이 발생하고 있는 15절과 대조적으로 18절은 우리를 낳으시고,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믿을 수 있는 대리자가 되신 분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그래서 위로부터 오는 축복은 이중적—창조와 새 창조—이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찬양해야만 한다! (84.1)
 ■ 말씀을 적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