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부 시련과 유혹 (1:1-18) 3. 축복이냐, 비난이냐 (1:12-18)
 사람이 시련, 실패, 패배, 불공평, 고통들과 부딪쳤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제 야고보가 몰두하게 되는 문제이다. 그는 여기에 두 가지 대응이 있음을 제안한다—하나는 긍정적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났을 때마다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으로 윤곽을 잡았다(1:2).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와 같은 고난들이 인내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3절).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시련, 실패, 패배, 불공평, 고통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그의 함축된 질문에 대답을 시도할 때 이런 이유의 방향을 유지한다. 그 첫 번째 대답은 긍정적으로 인내를 가지는 것이다(12절). (71.1)
 그러나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에 대응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야고보의 공동체 속에는 그들이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 그것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인내하기보다(2, 3, 12절)는 차라리 고난의 결과에 굴복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시험하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권에 대한 빛 속에서 죄악의 존재를 설명하는 실제적인 신정론을 제시함으로 대응한다.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험은 어떤 내적이고, 개인적이고, 죄악된 욕망의 결과인 것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시험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다(마 6:13; 눅 11:2과 비교하라). 그는 죄와 시험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는 오직 선한 것들의 근원이시다. 그는 오직 좋고 온전한 선물만을 주신다(1:16-18). (71.2)
 ■ 말씀에 들어감
 12-18절을 두 번 읽은 후에 아래의 과제를 해보라.
 1. 당신의 성경의 각주나 난외주에 기록된 구절들을 살펴보라. 야고보서에 있는 이 구절과 가장 정확하게 유사한 성경의 다른 본문을 뽑아 보라. 당신은 야고보서와 차이가 있거나 야고보의 논쟁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강화시켜 줄 어떤 본문을 찾았는가? 그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만일 당신이 차이점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72.1)
 2. 12-15절을 읽으라. 당신은 시련이라는 단어 대신에 시험이라는 단어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좋고 더욱 자연스럽게 된 경우를 발견하였는가? 더 적합한 것처럼 보이는 시련이나 시험을 사용한 이런 절에 대하여 당신 자신만의 의역을 적어 보라. 당신이 왜 그것을 선택하였는지 덧붙여 진술하라. (72.2)
 3. 성구사전에서 시험(temptation)이나, 미혹하다(tempt) 혹은 그것에서 파생된 어떤 다른 단어들이 있나 살펴보라. 시험의 근원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구절을 적어 보라. 13-15절에 있는 야고보의 논쟁과 그 본문을 비교해 보라. 당신이 발견한 구절들의 빛 안에서 시험의 근원에 대한 야고보의 의도를 설명하라. (72.3)
 4. 선물 혹은 보상으로서의 “면류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 성구 사전을 사용하라. 각 구절들이 (본문에 따르면) 승리자의 면류관(운동이나 군대)에 대한 언급인지 혹은 왕의 면류관에 대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을 만들라. (72.4)
 ■ 말씀을 탐구함
 인내로 인한 축복
 1:12-18에서 고난에 관한 주제가 야고보의 마음을 계속하여 몰두하게 한다. 그는 그의 서신의 시작에서부터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움직였다(2-18절). 그의 초점은 그의 공동체가 당하고 있는 고난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그 고통, 고난이 다양하고 많은 종류가 있음을 보았다(2절). 비록 야고보는 2-8절에서 그 고난의 예들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서신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이 주로 외적인 고난에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의 초점은 예를 들면 경제적 압박(2:6; 5:4), 신체적 투쟁(4:1-2), 질병(5:14), 그리고 고난의 다른 형태(13절)로서의 그러한 빈곤과 고난에 있다. 그의 독자들이 그가 다루고 있는 고난이 외적인 것임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1:9-11의 그의 첫 비유에서 그것이 분명해진다. 9-11절에서 그는 매우 분명한 용어들로 대 역전의 개요를 잡는다: 부한 자, 모든 것이 잘되어 분명히 어떤 고난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소멸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반면, 가난한 자, 비천한 환경에 있어서 경제적 생존에 대한 고난을 당한 자는 높아질 것이다(9절). (73.1)
 이러한 생각의 선상에서 야고보는 두 축복 중의 하나를 제안한다(12절; 다른 것은 25절을 보라). 그 축복은 고난을 만났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12절이 야고보의 구성과 논쟁에서 중추적인 절임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자가 어떻게 고난에 대응하는가에 관한 논쟁에 대한 부분이다. 그 응답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고통당하는 자는 인내로 반응할 수도 있고(12절),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시험하시는 그분에 대해 비난하는 것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13절). 우리는 처음에 두 단어—시련과 시험—가 같은 헬라어 peirasmos에 대한 번역임을 보았다. “시련”(trails)은 외적 고난에 관한 언급인 반면 “시험”(temptation)은 내적 고난에 관한 언급이다. 그것은 야고보가 매일 당하는 외적인 압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2절에서 매우 분명해 보이다. 그러나 13절14절에서 peirasmos는 죄를 범하게 하는 내적 시험에 관한 경험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12절에서 그 의미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의 peirasmos2절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고, 1:12은 그것의 앞에 나오는 모든 절에 대한 논쟁을 포함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2절로 거슬러 올라가 평행을 이루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다른 성경학자들은 12절peirasmos를 다르게 해석한다. 1-11절을 결론짓는 절이라기보다는 12절13-15절을 위한 서론적인 구절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험”(temptation)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12절에서 야고보는 그 단어의 모호함을 깨닫고, 그것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한 듯이 보인다. 그러고 나서 이 구절은 변환 구절로써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2-11절의 논쟁에 관한 요약인 동시에 13-18절에 있는 토론의 서론인 것이다. 이것은 외적 고난과 내적 시험이 모두 다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만나는 영원한 투쟁의 부분들이라는 사실이다. (73.2)
 야고보서에서 시련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인내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여기(12절)에서 2-4절에서 진술한 그의 입장을 반복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시련을 만났을 때(고통, 불공평, 어떤 공격, 실패, 어떤 상실, 질병 등), 우리는 그것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인내해야만 한다. 그가 처음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 12절에서 그는 참음과 인내의 미덕을 계속하여 칭찬한다. 두 가지 입장에서 인내는 능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저항과 용기를 포함하며, 수동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때로 “끈기있는 인내”라고 부르는 순종적인 태도이다. 우리가 2-4절의 우리의 연구에서 주목한 바에 의하면, 이 문맥에서 야고보는 인내를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것은 B.C. 2세기에 시리아의 압제자와의 싸움에서 도움을 주었던 일곱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와 제사장 엘리에셀의 적극적인 용기와 인내에 대하여 외경 마카비 4서에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제1장 ??쪽을 보라). 그러므로 인내는 능동적인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더 나아가 그것은 영속적이고, 흔들리지 않고, 무너질 수 없는 사람—아픔, 고통, 고뇌,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는 사람에 관한 언급이다. 그런 사람은 축복을 약속받았다. (74.1)
 이 구절(12절)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있는 예수의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축복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75.1)
 야고보서의 축복은 마태복음의 그것과 두 가지 영역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야고보서에는 고난의 배경인 박해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외할 수 없지만, 만일 우리가 그것을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침묵으로 인한 논쟁이 될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의 축복은 단순히 고난을 시험받고, 당하는 사람(마태복음의 경우, 박해를 받는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야고보의 의도는 그의 공동체가 겪고 있는 혹독한 고통의 기간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다. (75.2)
 인내하는 자에게 보장된 축복은 실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다(1:12). “이 면류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승리자의 면류관인가? 아니면 운동이나 군대의 포상의 면류관인가? 아니면 그것은 받는 자의 높고 뛰어난 위치를 의미하는 왕실의 면류관인가? 비록 많은 성경학도들이 승리자를 위한 “포상”으로 해석된 것으로 면류관을 칭하여 본문을 보려 하지만, 우리는 야고보의 마음속에서 “왕실”을 의미하려 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특별히, 선행되는 절에서(9-11절) 그가 고양된 비천함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렇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승리자의 면류관인지, 왕실의 면류관인지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된 것이라는 것이다(12절). (75.3)
 보상으로서의 면류관(혹은 영광의 관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에 관한 약속은 구약 성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면류관/영광의 관에 관한 약속에 대한 흥미로운 보기들을 가진 잠언서는 지혜의 수여와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잠언서를 포괄하는 첫 권고에서 지혜자는 아버지의 교훈과 어머니의 가르침이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1:9)고 진술한다. 그 책의 후반에 지혜가 여성으로 신원이 밝혀지는데, 만일 지혜가 존중받고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당신을 높이”“당신을 영화롭게”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4:8, 9; 또 12:4; 16:31; 17:6을 보라). (76.1)
 야고보는 그의 생각 속에 이 지혜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지만(그의 책은 지혜 모티브가 충만하다), 아마도 그는 그의 독자들이 그 면류관에 대해 주께서 오실 때에 미래의 종말론적 보상에 관한 용어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고보서 1:12“의로운 자는 영원히 살며, 그들의 보상은 주와 함께 있고, 가장 높으신 이가 그들을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손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왕관과 아름다운 왕관을 받게 될 것이다”(5:15, 16)라고 말한 솔로몬의 지혜서(야고보의 서신보다 대략 75년 정도 먼저 쓰여진 외경서)와 병행을 이루게 될 수 있다. 이 종말론적 초점은 또한 야고보서보다 후기의 성서 기록들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그의 지상의 생활의 끝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 8). 그러나 서머나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통과 면류관의 관계는 가장 분명하게 야고보서와 평행을 이룬다. 계시자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다(계 2:10; 또한 벧전 5:4을 보라). (76.2)
 고통과 면류관의 상호 작용은 역사를 통해 기독교 사상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의 예술적 표현에도 또한 널리 퍼져있었다. 우리는 꽤 자주 시련에 대한 인내에서 비롯된 승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십자가와 얽혀있는 면류관을 본다. 수세기를 통해 많은 기독교 순교자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고난을 경험했던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기록과 같은 그러한 약속을 인하여 힘을 얻고 지탱할 수 있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십자가를 견디는 동안 면류관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상징적 십자가는 육체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어떤 사람의 건강이 약해졌을 때; 그것은 경제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재정적 안정이 없거나 안전의 상실에 대한 긴급한 위협이 있을 때 또는 그것은 사회적이거나 관계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배우자가 신실하지 못하고, 욕을 하거나 혹은 결혼을 포기하게 될 때이다. 상징적 십자가나 고난이 있다할지라도, 야고보는 인내하도록 요청하고 그는 면류관을 약속한다. 사실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나 딸은 비록 시험과 시련이 가장 극심할 때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면류관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1:12)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