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와 안식일 제 9 장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우리의 모든 날이 빚이옵니다
 6일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보낸 날들이다. 크게 흉년이 든 먼 나라에서 궁핍하게 지낸 날들이다. 아버지께 지은 죄를 뉘우치며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의 품꾼을 부러워하며 지낸 날들이다. 그리고 제칠일은 이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간” 날이다. “오늘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마 6:11, 12) 라고 기도하는 날이다. 이날에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지만” 그리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눅 15:14-24)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지만 아들의 고백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14-24)이다. (91.1)
 사람아들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가르치셨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명령받는 것을 행한 후에 밭에서 돌아와서도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주인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그 후에야 먹고 마시지 않을 수 없으나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하였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할지니라”(눅 17:7-10). (92.1)
 종이 아니라 친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해도 그는 아버지의 양식으로 먹고사는 것이지 자기 양식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자식에게 내리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던”(눅 15:21) 자식이겠는가?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고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빚진 마음까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 항상 빚지고 사는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92.2)
 그래서 안식일의 아들은 “부족이 없는 땅에서 먹고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수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 혹시나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에게 양식 주시는” 하나님을 잊을까,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산다고 할까”(신 8:13, 14 참조) 두려워해야 한다. 혹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들꽃과 공중의 새들만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실 뿐(마 6:26, 28) 씨뿌리고 밭 갈고 추수하는 나는 내 힘으로 먹고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아들의 정신이다. 내가 백주에 날벼락을 맞지 않고 사는 것은 내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애 3:19). (92.3)
 뿐만 아니라 내가 씨뿌리고 김매고 추수하였으니 내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한 것이 아니다. 흙과 공기와 햇빛과 비와 씨앗이 모두 아버지가 마련한 것이다. 사람아들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죄의 용서와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께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 받으면 받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만 공로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날이 공로 없이 용서받고 사는 날이다. 이점에 있어서 안식일은 모든 날의 대표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용서와 “양식을 비같이 내리신”(출 16:4) 날들의 대표인 것이다. (93.1)
 “오늘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날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나이다”와 같은 감사 기도이다. 안식일의 이 기도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풍성히 내리신”(신 8:16) 은혜를 기억하는 기도이다. 광야의 굶주림을 기억하고 광야에서 배불리 먹었던 만나를 기억함이다. 빚진 마음의 기도이다. 지나온 세월이 빚이었고 오늘이 빚인 것을 기억하는 기도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빚이 옵니다” 라는 기도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빚이옵니다” 라는 기도이다. (93.2)
 진실로 아들의 마음은 빚진 마음이다. “하늘과 아버지에게 빚진 마음이다”(눅 15:18).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롬 1:14) 마음이다. 아버지가 그 빚을 “다 탕감하고,” “다 갚은” 아들의 마음이다. 아버지가 “비싼 값으로 다시 산” 아들의 마음이다. 성인의 마음은 빚진 마음이라 했다. 안식일의 아들의 마음은 참으로 빚진 마음이다. (94.1)
 안식일은 이 빚진 마음이 망극해지는 날이다. 아버지께 진 갚을 길 없는 큰 빚을 모두 탕감해 준 아버지의 은혜와 헬라인과 야만인과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에게 진 그 큰 빚을 “호리도 남김없이” 다 갚아준 아버지의 은혜가 망극해지는 날이다. 나에게 빚진 자에게 각박했던 지난날의 내 마음이 더없이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곡식 이삭처럼 용서를 비는 마음과 용서받고 다시 아들이 된 고마운 마음과 그 사랑에 헌신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머리와 몸과 마음이 크게 구부러지는 날이 안식일이다. (94.2)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의 삶은 죄인의 괴수 같은 삶이었다. 날 강도 같은 삶이었다. 여섯 날을 훔쳐 살고 일곱째 날을 도둑질해 온 날 강도의 삶이었다. 여섯 날의 재산을 허비한 날 강도였고 일곱째 날의 은총과 기회를 헛되이 해 온 날 도둑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세월을 아끼지 못한 이 날 도둑을 용서하고 아들로 영접해 주셨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게 하고 손에 귀한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제일 좋은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어주시었다. (94.3)
 이제 안식일의 아들은 이전같이 철없는 마음의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인생의 질고를 아는 아들이다. 빚진 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아들이다. 서로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진 아들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 이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아들이다. (95.1)
 이 정신이 아브라함 헤셀이 전하는 바 옛날 그 유명한 랍비 엘리멜렉의 집에서 일했던 늙은 하녀가 증언하는 안식일의 정신이다. “내가 전해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뿐입니다. 어느 집에서나 마찬가지로 그 집에서도 우리 하녀들은 한 주일 내내 다투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이르러 오는 금요일 저녁마다 부엌의 분위기는 대속죄일의 저녁과 같이 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바꾸어 생각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압도되었습니다”(안식일: 시간 속의 지성소, 44). (95.2)
 오늘날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을 주옵소서
 그러나 제칠일은 또 다른 뜻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신 8:3). 탕자로 주리게 하심은 아버지께로 돌이켜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 집과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려 하심이다. 탕자는 주려 죽게 되자 아들이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96.1)
 진실로 아들의 양식은 아버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다. 6일 동안에 내리는 만나는 사람의 양식이다. 제칠일에 내리는 양식은 아들의 양식이다. 사람의 만나가 아니라 아들의 만나이다. 제칠일은 사람의 날이 아니라 아들의 날이다. 아들로서의 사람의 날이다. 사람아들의 날이다. 이 아들의 양식, 곧 제칠일의 양식은 들에 내리지 않는다. 밀밭이 아들의 양식이 아니다. 보리밭이 아들의 양식이 아니다. 아들의 양식을 거두려고 들로 나간 사람들은 만나를 구하지 못했다. 아들의 양식을 찾아 밀밭으로 나가고 보리밭으로 나간 사람들을 만나를 구하지 못했다. 아들의 양식은 아버지의 집에 있다. 안식일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들의 양식은 아버지의 입으로부터 내린다. (96.2)
 사람의 육체는 떡을 먹고산다. 그러나 사람은 아버지의 말씀을 먹고 아들이 된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큰자식이 제대로 자란 자식이다. 아버지의 입의 말씀을 먹지 않는 자식을 호로 자식이라 하고 호래아들이라 한다. 제풀로 막자란 아들이란 뜻이다. 아버지의 입의 말씀은 성령이다. 성령이 아들의 일용할 양식이다. 그리하여 아들은 일용할 양식을 들에서 구하지 않고 밭에서 거두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께 구한다.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한다. (97.1)
 그러나 영적 양식만 아버지의 입의 말씀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만 아버지의 입의 말씀이 아니다.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가,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가 곧 양식이 되었다. “네 죄가 사함 받았다” 하는 말씀 한마디가 영적 생명의 양식이 되었듯이 아들의 육적 양식도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라사대 한 마디가 곧 하늘이요, 바다와 땅이요, 그 가운데 만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창 1:11-12). (97.2)
 그러나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8:14).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셨다”(롬 8:16). 안식일의 사람은 아들로서의 사람이다.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다. 아들로서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이 영의 사람이다. 육체의 아들이 아니라 영의 아들이다. 육체는 무익하고 영이라야 산다. (97.3)
 성령으로 다시 낳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영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우리를 아들로 부르시는 천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나를 아들로 부르신 천명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천명에 의해 아들의 일을 맡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아들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엡 1:13) 이다.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신 자이다”(요 6:27). 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요 17:4) 받은 자이다. 아버지의 아들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 12:49, 50) 말하는 자이다. 이 아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아들이다. (98.1)
 이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일용할 양식이 어찌 잠시 있다가 없어질 무상한 육신의 양식에 국한되겠는가. 하루 세끼씩 부처님 공양하듯 먹이고 보살펴도 100여 년의 세월 끝에 내 육체가 무엇인가. 추하게 쇠락하고 부패하여 흙 속으로 흩어지나니 실로 무상한 것이다. 허망한 육체요 허망한 공양이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무상한 육체 공양에 사로잡혀 안식일인 오늘날에 와서 까지 육체의 일용할 양식에 매달려야 하겠는가. 안식일에 영의 주체요 자유자로 나선 자가 육체의 만나를 구하러 들로 나가겠는가. 육체의 만나를 거두기 위하여 들로 나가기를 거부한 안식일의 아들이 영의 지성소인 안식일에 서서까지 어찌 저 덧없는 끼니 걱정에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