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0 장  안식일, 지존자의 은밀한 숨골
 틈과 숨골
 사람의 뒷목에는 숨골이라는 호흡중추가 있다. 나의 고향 제주도 사람들은 현무암 지표면에 깊게 갈라진 틈을 숨골이라고 부른다. 땅이 그 갈라진 틈으로 숨을 쉰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95.1)
 사람들에게 나날들은 마치 현무암 지표면과 같다. 책임과 질서로 다져진 시멘트 운동장과 같다. 거기에는 풀 한 포기 솟아날 틈새가 없다. 벽돌 같고, 시멘트 바닥 같고, 장벽 같은 삶의 억압에서 사람들은 숨이 막힌다. 그런데도 어떻게 틈이 숨골이 아니겠는가? 틈이 나야 산다. 틈을 내야 산다. 성벽에, 골방에, 차돌 같은 땅바닥에 틈을 내야 한다. 천길 깊이의 바다와 하늘에 틈을 내야한다. 동서남북이 분간 안 되는 우리의 혼란한 일상에 틈을 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억척같은 우리들의 미움과 그 끝 모르는 탐욕에 틈을 내야 한다. 나에게 안식일은 시간의 갈라진 틈새이며 시간의 숨골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달픈 삶의 틈새이고 숨골이다. (95.2)
 틈은 곧 바람이고 빛이다. 풀잎이고 물방울이다. 자백이고 용서이고 화해이다. 우리 마음의 틈을 통하여 그 동안 뭉치고 쌓여온 온갖 원한과 욕망은 쏟아지고 비워진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잔은 빈 잔이 된다. 새까맣게 숯이 된 비원도 그 틈으로 말미암아 향연으로 피어올라 하나님의 시온소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틈은 숨골이다. 휴식의 숨골이고 자유의 숨골이다. 거듭남과 부활의 숨골이다. 나에게 안식일은 이러한 틈이며 이러한 숨골이다. (95.3)
 사람에게 시간은 파도와도 같다. 세월은 세파이다. 우리의 숨인 안식일은 그 흉흉한 세파 위를 틈내며 떠간다. 우리 마음 안에 일고있는 거친 세파에 틈을 내며 떠간다. 우리의 숨막히는 세파 위에 숨골로 떠간다. 그 이름의 뜻이 “쉼”인 노아가 방주를 타고 거센 바다 물결 위를 틈을 내며 떠가듯이 안식일이 거센 세파 같은 우리의 고달픈 삶에 틈을 내고 우리의 숨골로 떠간다. (96.1)
 우리들의 신앙 인식에서 안식일 안식은 잔잔한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방주의 모습으로 떠오를 수 있다. 한가로이 떠있는 숨의 섬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 안식을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쉼과 숨에 이르는 우리의 좀더 절박하고 격렬한 안식일 신앙 생활의 실재가 너무 가볍게 취급받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거센 파도 속을 헤쳐 가는 노아의 방주처럼 우리의 생명의 배, 곧 우리의 숨 배가 막힐 것 같고, 끊어지고 터질 것 같은 목숨을 부둥켜안고 절벽 같은 바다를 뚫고 찢어 숨과 쉼의 충만한 대기에 다다르는 모습이 우리의 안식일 안식의 진정한 경험에 가까울 것이다. (96.2)
 노아의 방주는 이름 그대로 쉼의 방주이다. 숨의 방주이다. 노아는 방주의 코 같은 존재이다. 노아는 그 쉼이며 숨이며 숨쉬는 코일 것이다. 숨배인 노아의 방주가 생존을 파묻으려는 바다의 수면 위로 머리를 쳐들고 하나님의 숨이 충만한 생명의 대기 속으로 그 코를 디미는 격렬한 모습이야말로 안식일 신앙 생활의 참 모습이다. 안식일 신앙 생활에는 이렇듯 치열한 삶의 실재가 내포되어 있고 안식일 호흡의 치열한 운동성과 투쟁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96.3)
 안식일 숨 신앙의 더 극적인 모습은 홍해 전체를 두 동강으로 갈라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구원의 숨틈을 벌려놓던 출애굽의 사건이나, 천지를 빛과 어둠, 하늘과 땅과 바다로 틈을 갈라놓았던 창조 사건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 자체도 창조 사건과 출애굽 사건에 곧바로 천지의 그 큰 틈이요 생존의 큰 숨골인 안식일을 연계시켜 강조하고 있다. (96.4)
 태초의 안식일 안식은 노아의 바다보다 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던”(창 1:2) 창세기의 바다에 운행했던 하나님의 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안식일 안식은 노아의 바다 못지 않게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절망에 떨게 했던 홍해의 바다를 그 표면에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두 동강이 내고 강 이쪽에서 저쪽까지, 바다의 바닥에서 강 이쪽에서 저쪽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숨길을 튼 사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97.1)
 틈 사람, 틈 세상, 틈 시간
 인구(人口)요 인생(人生)인 사람이 인간(人間)으로 올라서는 단계는 어떤 단계인가. 사람이 사람과 사람의 틈을 식별하고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인식하는 단계일 것이다. 즉 사람을 틈으로 보는 단계일 것이다. 사람의 틈이 관계이고 사람의 사이가 관계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하나님의 성소이다.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삼강오륜이 여기에 있고 십계명이 여기에 있다. 결국 관계의 인생이 인간이고 인륜의 인생이 인간이다. 너와 나 사이가 성소로서의 사이이고 십계명으로써 사이인 인생이 인간이다. 나와 너 사이가 안식일 계명의 사이인 인생, 너와 나 사이가 쉼이며 숨인 인생이 인간이다. (97.2)
 사람의 사이가 좋아야 인간이다. 사람의 틈이 좋아야 인간이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사랑이 생기고 아이가 생긴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트고 자기의 마음 안에 좋은 사이를 만들 수 있어야 어른이 되고 시민이 된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된다. 자기의 내부에 사회적 숨골인 분별이 생기고서야 인간인 것이다. 자기 마음속의 틈 때문으로 사람이고 인간인 것이다. 사람들 중에도 정말 탁 트인 사람은 자기 내부에 진정한 숨골 곧 분별과 사랑의 숨골을 갖은 사람이다. 인생이 인간이 되는 틈이 아비를 받아들이고 자식을 받아들이고, 신부를 받아들이고 신랑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틈이다. (97.3)
 꽉 막힌 사람이라는 호칭은 인간에 대한 비칭이다. 빈틈에서 눈물이 나오고 빈틈에서 피가 나온다. 꽉 막힌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안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 삶에 숨과 쉼을 향유할 틈새를 갖지 못한 사람이 곧 안식일 없는 사람이다.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사람이 곧 안식일 없는 사람이다.. (98.1)
 창조의 여섯 날은 모두 시간의 틈이고 시간의 사이이다. 제칠일은 그 시간의 큰 틈이다. 조물주는 창조의 첫날부터 시간을 틈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섯 날의 틈이 소멸되는 차원에서, 여섯 날이 한 묶음의 틈 없음으로 숨막혀지는 차원에서 더 근본적이고 더 큰 틈새를 창조하셨다. 그 틈새가 제칠일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그 제칠일을 조물주와 천하만물이 한 통속을 이루어 함께 참여하고 호흡하며 삶을 구가하는 큰 숨골로 삼으셨다. 조물주는 천지간에 제칠일의 틈을 냄으로써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 안과 사람 안과 세계 안에 큰 틈을 내었다. 제칠일 안식일로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 사이에 친함과 유별함이 일깨워졌다. 이로써 트인 사람, 트인 세계, 트인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열린 삶, 열린 관계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호흡하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98.2)
 생명의 호흡이 샘솟는 지존자의 은밀한 숨골
 그러나 안식일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그 마음 안에 터놓은 큰 틈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틈이 곧 안식일 안식이다. 나를 그 깊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깊은 틈새가 곧 안식일 안식이다. 그리고 지존자의 은밀한 깊이에 숨겨져 있던 안식일 안식이 우리 모두의 삶 앞에 드러났다. 곧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사이에 걸어다니시는 하나님의 깊은 숨골이다. 안식일 안식의 화신이다. (98.3)
 그러나 지존자의 은밀한 숨골이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숨골인 안식일 안식은 세상의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 돌처럼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 버린 숨골이다. 그 뿐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안식일 준수자들에 의해서도 안식일 안식의 축복은 그 평범한 외양 때문에 소홀히 취급되었다.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듯 저 진정한 숨골인 예수에 의지하여 숨을 쉬고 마음을 쉬면 되는 이 생명의 길이 수많은 안식일 준수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소홀히 되어 왔다. (99.1)
 안식일의 숨골은 숨은 골이다.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골방이다.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다”(아 4:12). 진실로 우리의 숨골은 지존자의 은밀한 처소(시 91:1)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안식일 준수자들이 호흡하는 안식일 안식의 숨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감추어있는 숨이다. 하나님의 깊은 곳, 예수의 깊은 품에서 솟는 안식의 숨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안식일 안식의 숨이다. 우리들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저 지성소의 법궤 안 한 가운데서 생수의 강 같은 제칠일 안식일 안식의 현존을 보았다. (99.2)
 또한 안식일의 호흡은 우리의 깊고 은밀한 심령에서 받아들이고 내쉬는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의 숨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과 생명의 숨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은 “너희 안에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 2:5)고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엡 3:9)의 숨이다. 우리의 영생을 위한 비장의 생명이다. (99.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의 숨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숨골이다. 그 숨골로 우리가 초청된 날이 안식일이다. 예수에게로 나아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듯”(요 7:38) 성령의 숨이 샘솟듯 하는 삶을 살 것이다. 생수의 강이라고 말했거나 성령의 숨이라고 말했거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요 7:39).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