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3 장 모세 언약
 십계명은 그의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구속주의 교훈이다. 십계명은 이제 막 이스라엘을 그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의 구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와 신실하심과 의의 하나님이셨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의 거룩케 하는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었다. 열 가지 교훈의 말씀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은 이미 구속 받은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순종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서약을 그 말이 다 옳도다(신 5:28; 참조 출 19:8; 24:3, 7)고 하시며 헌신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 받아들이셨다. 해럴슨(W. J. Harrelson)은 이 언약 신학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47.2)
그러나 토라는 법적인 요구 이상을 의미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부터 모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루신 모든 범위를 포괄한다. 더 나아가, 토라는 하나님의 선물로도 이해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여전히 토라의 기초를 형성한다(느 9 장).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고 토라를 받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토라에 대한 순종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13
(47.3)
 이 점에서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ew Scoheld Reference Bible, 1967)은 성경적 언약 신학을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약속 세대는, 비록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시내에서 주어진 율법에 의해 대체되었다[즉 ‘파기되었다’]”14고 하였다. 시내 율법을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의 “대체”로 보는 이런 오해는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언약을 “없이 하지 못”한다는 갈라디아서 3:17의 바울의 선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48.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할례 표징 외에도, 아담과 맺은 창조 언약의 연장인 안식일을 그 언약 자체의 특별한 표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모세는 안식일이 출애굽 해방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참조 신 5:15), 안식일에 구속적인 의미도 부여하였다. 모세는 안식일에 하나님의 창조 행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속 행위도 기념하는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모세의 언약은 매주 안식일 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그분의 구속의 은혜와 결합시킨다. 페인(J. Barton Payne)은 다음과 같이 올바로 진술하였다. (48.2)
시내 계명 전체를 ‘정죄와 사망의 직분’으로 깨끗이 처리해 버리는 것은 구약을 총체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율법은 결코 불가능한 짐이 아니었다(신 30:11-14).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사랑하였다(시 1:2; 119:167) ∙∙∙ 율법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신앙,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신 1:32; 9:23).15
(48.3)
 세대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 사이에서의 그릇된 딜 레마를 만들어 내었다. 토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동반자와 종으로 보존하고 보호하여 열방을 구하는 제사장적 빛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희망에 나타난 율법의 다양한 기능을

   1) 언약에서의 율법

   2) 예배에서의 율법, 그리고

   3) 종말론에서의 율법으로 분류하였다.(이 문제는 제5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49.1)
 1. 언약에 나타난 율법
 돌비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된 율법은 증거라고 불렸고, “얼굴을 서로 대하여” 덮개를 향하고 서 있는 금으로 된 두 “그룹”과 함께 “속죄소” 또는 “시은소”로 덮인 특별한 궤 안에 보관되었다(출 24:12; 25:17-22). 그 증거궤는 셰키나의 영광이 머무는 지성소 안에 있었다. 그래서 야훼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시 80:1; 99:1)었다. 이렇게 하여 십계명은 하나님 왕국의 헌법으로 높임을 받았다. (49.2)
 하나님의 율법은 성소의 경내에 놓였다. 그리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거처에서 그분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베푸는 제사장적 봉사의 기능을 하였다. 이 일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레 16:15, 16) 속죄소 위에 희생의 피를 일곱 번 뿌리는 대속죄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49.3)
 하나님 자신 속에 공의와 자비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로 이렇게 율법과 은혜는 깨질 수 없는 상호관계로 연합되었다. 율법을 하나님의 성소와 그 속죄의 은혜에서 분리하여 그것만을 취하면 거룩한 율법에 대한 오용이 될 것이요, 반드시 율법주의와 거짓 안전으로 유도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화목케 하는 은혜가 영원히 필요함을 상기시키는 언약의 법으로 주어졌다. (49.4)
 유월절 어린양과 십계명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두 가지 선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기와 시편이 증거하는 것처럼, 죄를 고백하고 희생의 대속 제물을 드림으로써만 구원과 성화의 언약 관계 안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는 율법과 유월절 어린양 둘 다 필수적이었다. (50.1)
 토라는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포함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 가지 다른 부류의 율법들 즉 도덕률, 의식법 그리고 시민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양피지에 기록한 다른 법들은 부차적으로 중요한 장소인 법궤 곁에 두게 하신 반면, 증거판들은 언약궤 안에 두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심으로써 그가 친수로 돌비에 기록한 “십계명”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참조 출 25:16, 21; 신 10:2-5; 31:24, 25).. (50.2)
 2. 이스라엘의 예배에 나타난 율법
 이스라엘은 경배의 책인 시편 특별히 시편 1, 19, 25, 37, 40 그리고 119편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토라에 대해 기쁨과 감사를 표한다. 다윗은 “야훼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 25:4, 5)라고 기도하였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구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야훼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50.3)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은 제사장 아삽이 경고하듯 그분의 축복을 주장하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시 50:16, 17). (50.4)
 하나님은 아삽이 증거하듯 마음의 순종을 요구하셨다.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7).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는 하나님과 구속적 관계 안에서 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야훼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분명히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은 그의 도덕률을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50.5)
 시편 19편136편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시편은 각각 우주의 창조자와 이스라엘의 구속자를 결합시키는 연속 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의 창조주와 출애굽기의 구속주 하나님이 한 분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예배의 신앙적 초석들이 다른 시편들에서도 간단히 표현되어 있지만(33:6, 7; 95:3-5; 104; 121:2; 134:3; 146:5-6), 시편 19편136편에서처럼 두드러지게 강조된 곳은 없다. (51.1)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지혜와 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우뚝 서 있다. 이합체(離合體)의 시적 구조로 기록된 그 시는 각각 여덟 행으로 된 스물두 연에 히브리어 알파벳을 사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의 구속자이며 왕이신 분의 수많은 덕을 포괄하고 있다. 시편 119편은 토라에 해당되는 여덟 개의 교환 가능한 단어들을 사용 하면서 야훼를 믿는 자의 기쁨으로서 야훼의 토라를 칭송한다. (51.2)
 프리드만(D. N. Freedman)은 이 “토라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인에게 토라는 모세 오경에 주어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으로 살아야 하는 율법 이상의 훨씬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토라는 하나님께 이르는 인격적인 길이었다.”16 그러므로 토라는 하나의 분리된 개체로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과 임재의 기능을 한다. (51.3)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라고 외치게 되었다. 결국, 시편은 결코 “그”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 내가 당신의 율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에서와 같이 오직 토라트 야훼”“야훼의 율법,” “당신의 율법”, “당신의 말씀”, “당신의 명령”이라고만 말한다. (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