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3 장 모세 언약
 이 이슈가 문설주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매 집마다 심판의 천사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42.1)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스라엘 의식법에서 요구한(레 17:11) 대속의 희생으로서 무죄한 동물들이 죽는 그 죽음의 신학적 의미가 희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사 53:7)이신 무죄한 종 메시야의 자기희생을 가리켰다. 예수께서는 이 메시아적 의미를 이해하고 이사야 53장의 모든 예언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눅 22:37)라고 진술하셨다. (42.2)
 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뒤 이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시여보다 먼저 있었다. 율법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이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속죄를 제공하였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고 약속하셨다. 오직 피를 바르는 것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가게 할 것이었다. 이것이 종 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실물교훈이었다. (42.3)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을 대속의 희생 제물로 제공하셨다. 하나님이 고엘(Gôél) 즉 “친족—구주”로서 그의 “아들”의 자유를 “산 것이다”(출 6:6; 15: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로운 성취로서 연례적인 유월절 축제(출 12장)를 통해 민족적 해방을 경축하도록 요구를 받았다. (42.4)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을 위해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익사시킨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았을 때, 그들은 “야훼를 경외하며 야훼와 그 종 모세를 믿”(출 14:31)게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세의 노래에 동참하였다. “야훼는 용사시니 야훼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야훼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 야훼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3, 6, 13, 18). (43.1)
 이 모세의 승리의 노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를 그들의 군주와 구주로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바로의 종된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은 전적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야훼의 신실하신 사랑 곧 헤세드(hesed)에 의한 것이었다. (43.2)
 카이저(Walter Kaiser)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분의 사랑과 애정에서 온 것”8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고 그들을 열방 중에 구원의 “빛”으로 택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그의 자손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축복이 되리라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43.3)
 모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모세는 이스라엘과 맺은 시내 언약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과 은혜였다는 점을 강조했다(신 4:37; 7:7-9; 10:15).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경배한 사실이 그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야훼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며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출 34:6, 7) 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내 언약을 맺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야훼의 참된 속성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이 사랑과 거룩함의 하나님 품성을 반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높은 소명이었다(레 19:2, 18). 하나님의 율법이 그분의 도덕적 품성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로울리(H. H. Rowley)는 “인간을 위해 부과된 표준들은 하나님 자신의 품성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9라고 진술하였다. (43.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곧 “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으로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하여 모든 이방 나라들을 향해 제사장적 중보자가 되는 사명이 주어졌다(참조 출 19:5, 6). 이 선교적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berît), 즉 구속적 친교의 유대관계를 맺으셨다. (44.1)
 하나님과의 복된 친교에 머물기 위해 이스라엘은 이 책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분의 거룩하게 하는 친교의 표준을 변경하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것과 같은 믿음과 순종을 기대하셨다. 이스라엘은 “아들”“야훼의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어떤 “계약” 관계를 맺는 입장에 서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연스럽고 영적인 축복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거룩하신 분과 구원과 성화의 친교를 나누는 자리에 서 있었다.(신 8장 참조). (44.2)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구속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순종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 아래 놓이게 했다. 그것은 모세가 진술한 바와 같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하나인 야훼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신 6:4, 5). (44.3)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로부터 단지 겉으로 율법의 문자에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순종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에게서 감사하는 사랑을 기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출애굽 해방을 통해 먼저 구속적인 사랑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었다. 바로의 사형명령에서 구원을 받은 데 대한 그들의 감사가 순종의 동기가 되어야 했다. 그들의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심령과 의지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었다. (45.1)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서로 자비와 공의를 보이는 일에 그 추동력으로서 사랑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선지자 미가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을 요약한 것과 같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 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hesed)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스라엘은 그 자신이 거룩한 토라(Torah)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언약 공동체임을 깨달아야 했다. (45.2)
 토라의 의미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거룩한 교훈,” 가르침,” 또는 “지시”를 의미하는 토라(Torah)를 주셨다(출 24:12; 삼상 12:23; 참조 욥 22:22 NRSV, JB; 사 8:16, 20 NRSV). 히브리 성경인 유대인의 새 JPS 역(New JPS Translation)은 “토라”라는 단어를 오직 “교훈(instruction)”으로만 번역하였다. 해리슨(R. K. Harrison)은 토라에 대해 “그 직접적인 목적은 고려해야 할 다양한 상황에서 언약의 백성을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더 돈독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르게 하는 것”10이라고 설명하였다. 토라는 삶과 경배를 정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길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권고를 의미한다. (45.3)
 토라(Torah)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포함하게 되었다. 모든 교훈이란 모세의 첫 다섯 책뿐 아니라 후대의 시편과 선지자들의 책들도 가리킨다(참조 요 10:34; 고전 14:21). 이것은 토라가 성소에서 진행되는 대속의 은혜를 지도하는 레위기의 지시들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를 둘 다 포함한다. 이것이 “야훼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 19:7) 한다는 시편 19편에 나타나 있다.11 토라는 영혼을 소성케 하는 하나님의 교훈이며 삶을 위한 지침이다. 토라는 주께서 그의 자비와 거룩한 뜻을 계시하는 기초이며, 그의 성령을 통해 효력이 있다(참조 사 55:11; 느 9:20, 30). (46.1)
 시편 19편은 야훼의 토라의 견책하며 소성케 하는 권능에 대해 힘 있게 증거 한다. 다윗은 율법을 그 자체로 도덕률이 아니라 야훼의 언약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통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다윗은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시 19:12-13)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용서하시며 지키시는 은혜를 간구하였다. (46.2)
[주: 불행하게도 칠십인역의 헬라어 번역은 토라에 대해 노모스(nomos)”라는 단어를 택하였다. 그러나 노모스(normos)는 세속적이고 철학적인 사람들에게는 오직 외적 행동만을 규제하는 법전을 의미한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의식적 삶의 배경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유대교에 율법주의를 향한 경향이 생겨 났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학자들은 모두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으며 그 히브리어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한다. 십계명은 전혀 추상적인 법전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12
(46.3)
 십계명 자체가 그것은 추상적 율법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서언은 이 율법의 시여자가 누구이신지를 강조하여 선포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야훼로라(출 20:2). 이 서론은 십계명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것을 생략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한 백성 곧 택함을 받지 못한 백성에게 주어진 도덕적 요구가 되고 만다.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