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3 장 모세 언약
 모세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끈덕지게 되풀이 되고 있고, 다양한 대답들이 제기되어왔다. 종종 이 모세 언약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율법 요구로 제시되어 왔다. 결국, 모세 언약 혹은 시내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혹은 율법의 행위로 인한 의를 가르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는 피차 완전히 대립되는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37.1)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룩한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하실 때 주신 것(창 15:6 참조)과는 완전히 다른 구원의 길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셨는가? 아브라함의 은혜의 언약은 모세의 언약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중에 나타난 모세 언약의 공헌에 대해 탐색할 필요가 있다. 이 점진적 계시는 이스라엘 선택의 의미와 나머지 인류를 위한 그 사명과 관련이 있다. (37.2)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실하신 창조주
 유대인 신학자 부버(Martin Buber)는 시내 언약은 새로운 창안 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 즉 “이미 존재하던 관계”1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요츠(Jacob Jocz)는 이것을 “시내에서 일어난 일은 부조들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을 재확인하신 ‘조상들의 하나님’과 만난 것이었다. 모세는 야훼라는 이름의 새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 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 2:15)을 소개하였다. 그 하나님이 특별한 친교의 표시로 그의 이름을 계시하신 것”2이라고 설명하였다. (38.1)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에 의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들에게 내린 바로의 사형명령(출 2:24; 3:6-7)으로 근심하고 있었다. 이 조상의 하나님이 “나는 야훼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 이제 ∙∙∙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2-5)고 말씀하시면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임명하셨다. (38.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분의 약속(창 17:7)을 재확인하는 “나는 ∙∙∙ 너희 하나님 야훼”(출 6:6, 7)라는 자기 칭호로 자신의 신실하심을 묘사하셨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조들에게 하신 그분의 언약의 약속을 직접적으로 이루는 것이다. (38.3)
 카이저(Walter C. Kaiser)는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저자는 부조들과 출애굽의 시기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그에게 시내 언약은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연속이었다”3고 설명하였다.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시내 언약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38.4)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창조 능력에 대한 특별한 표징들, 즉 모세의 지팡이를 산 뱀으로 바꾸시고, 건강한 손을 문둥병이 발한 손으로 변하게 하시고, 다시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등 그분의 창조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표시를 모세에게 기꺼이 제시해 주셨다(출 4:2-7, 11). 그렇게 창조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은 구속주는 그의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시는 창조주라는 것을 모세에게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39.1)
 모세는 약속의 땅 변경에 서서 하나님은 이전에 한 그의 약속에 신실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기시켰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야훼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hesed)를 베푸시되(신 7:9). (39.2)
 모세는 시내 산에서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은 헤세드(hesed) 언약”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 헤세드(hesed)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탐색하는 개념들 중 하나이다. 넬슨 글룩(Nelson Glueck)은 그의 학위 논문 성경에서의 헤세드(hesed)4에서 그 용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39.3)
 그는 헤세드(hesed)가 에메트(émet)나 에무나(émunah)와 함께 나타나는 곳마다 헤세드(hesed)의 고유한 개념인 충성이 강조 된다”5고 설명하였다. 성경 역본들은 헤세드(hesed)의 의미를 한 단어로 표 현하기 어려워, 그것을 “자애로움(lovingkindness, NASB),” “확고한 사랑(stead love, RSV).” “언약적 충성심(covenant loyalty, RSV),”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그 단어 헤세드(hesed)의 담겨있는 충성과 사랑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6 (39.4)
 하나님은 희생제물과 레위 제사장 제도와 함께 예식(또는 의식)법을 통해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또 사람끼리 화목하게 되는 길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식법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나타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도덕법과 의식법을 토라 안에 결합시키고, 그분의 의와 은혜로움을 둘 다 강조하셨다. (40.1)
 율법보다 앞 선 하나님의 선택
 모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명칭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분이 언약과 맹세로 하신 자기 약속에 대한 신뢰할만한 성취자이심을 뜻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실하신 자존자(I AM)가 그를 보내셨으므로 바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보증을 주셨다.7 모세는 이제 하나님이 성취할 때가 왔기에(창 15:13, 16)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했다. (40.2)
 모세는 바로에게 주는 기별을 갖고 있었다. “야훼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 4:22, 23). 이것이 하나님의 택하시는 사랑에 의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신분이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그들에게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6)라고 상기시킨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40.3)
 이스라엘의 아들 됨은 애굽인들이 그들의 바로에 대해 믿었던 것처럼 육체적으로 신들의 아들이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아들 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을 반사하는 의무를 주신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그 아들은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41.1)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배경에는 이 “닮으라”는 호소가 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야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분의 장자로 칭하신 사실은 하나님이 그 분의 언약의 백성에게 특별한 권리와 의무를 주셨음을 지적한다. 이것들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구속적이고 거룩하게 하는 관계 안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41.2)
 부조들은 야훼를 단지 약속의 하나님으로만 알아왔다. 그러나 모세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야훼를 그분의 약속의 성취자로 알게 되었다. 이 사실로 인해 야훼라는 이름에 새로운 성격과 의미가 모세에게 부여되었다. 그것은 부조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야훼는 출애굽 구원을 통해 그의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 의식을 통해,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그들의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급히”(참조 출 12장; 히 11:28) 먹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통해 실현되었다. (41.3)
 율법보다 앞 선 유월절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구원 언약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점진적인 단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셨다. 첫째는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서이고, 그 다음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서이다. 하나님은 열 재앙을 서서히 강화시킴으로써 애굽에 대한 그 분의 인내를 나타내셨다. 이 재앙들은 “온 천하에” 야훼처럼 강한 하나님은 없다(출 9:14, 16, 29)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인들 모두에게 가르쳐 그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재앙들로 인해 자극을 받은 바로는 오히려 반대를 늘려갔을 뿐이다. 이로 인해 바로의 장자와 하나님의 “장자”(출 4:22)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최후의 재앙에 이르게 되었다.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