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듯이, 고통과 슬픔이 깊을수록 찬양도 높아진다.

 인간 정서의 깊은 데서 터져나오는 신음으로 시작되는 시편의 탄식들은, 높은 데서 부르는 찬양으로 화하여 그 절정에 이른다.

 — 시편 3편(43.1)
 시편—탄식의 책
 시편의 히브리어 본명은 테힐림(Tehillim)으로 “찬양들”이란 뜻이다. 이 말은 “찬양하다”를 뜻하는 동사 “할랄”(halal)에서 나온 말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인 “할렐루야”(hallelujah)와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은 “할렐루야” 책인 셈이다. 그런데 시편에는 이렇듯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시보다는 개인과 백성의 슬픔과 괴로움, 불평과 낙망 등을 표현한 탄식시가 더 많이 실려 있어 시편이 찬양의 책이라기보다 오히려 탄식의 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43.2)
 시편의 삼분의 일이 넘는 60여 편이 이런 탄식의 시들인데 그중 50편쯤은 개인의 탄식, 10편쯤은 백성의 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다윗의 시편으로 표제가 붙여진 시들은 더욱 이러한 비통을 표현한 탄식의 시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찬양의 책 시편에 이 무슨 이변인가? 탄식도 찬양이고 불평도 찬송이란 말인가? (43.3)
 그러나 다윗의 파란 만장한 일생을 생각하고 또 우리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쉽사리 그 까닭을 알게 된다. 즐거웠던 일보다는 괴로웠던 일이 더 많았던 날들이며, 모든 것이 흐뭇하여 감사에 넘쳤던 회상보다는 아쉽고 괴롭고 답답하여 마음이 눌리고 상했던 회상이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44.1)
 그것은 창세기만큼이나 오래된 시문서로 알려진 욥기에서도 생생하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기 14장 1, 2절). 이러한 회상은. 예전에는 드물게 오래 살았을 나이인 고희(古稀)였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편 10절). (44.2)
 울면서 태어났다가 울음 소리를 들으며 죽어가는 인생의 시말(始末)을 생각할 때, 인간의 짙고 진한 공통적인 경험을 앙금처럼 가라앉힌 시편이 탄식으로 가득 차 있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44.3)
 깊은 데서 탄식하고
 시편에서 우리는 우여 곡절이 많은 인생길의 깊은 골짜기와 한 없이 빠져 들어가는 심연을 경험한다. 그리고 거기서 외롭게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하는 연약한 인간의 애소(哀訴)를 듣는다. 인생 바다의 깊은 데 곧, 영혼의 해저 이만리(海底三萬里)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애가로 듣는 것이다. (44.4)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130편 1, 2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 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편 69편 1, 2절). (45.1)
 짓눌려 터진 포도알에서 포도즙이 흘러나오고 중압에 못 견뎌 으깨어진 감람 열매에서 감람유가 스며나오듯, 괴로움과 슬픔으로 상하고 터진 인간의 심령에서는 탄식이 애가로 엉켜나온다. 이것이 시편에 응고된 탄식시의 앙금이다. (45.2)
 그러나 시편에 쓰여진 탄식의 시들은 통속 문학이나 세상에서 흔히 듣는 그런 넋두리가 아니고 들어줄 사람도 없는 끝없는 장탄식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울음 소리를 듣고 달려와 모든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엄마가 있음을 확신하고 고고(孤高)하게 울어대는 고고지성(孤孤之聲)과도 같다. (45.3)
당장 문제가 해결되어 현실이 달라지지 않아도 좋다. 자신을 숨막히게 했던 탄원이 접수되어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맡아 처리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는 송사(訟事)이다.
(45.4)
 울음을 능사(能事)로 삼아 만사를 해결하던 어린 아기는 걸음마를 배워 자립(伯立)과 독보(觸步)를 익히면서 울음의 횟수를 줄여간다. 그러고는 독립(獨立)의 나이 성년에 이르면 자존심을 상할까봐 좀처럼 울지 않는 다부진 어른이 된다. 그러나 어른도 울어야 하는 때가 있다. 어린 아이처럼 다시 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45.5)
 그러나 그것은 어린 시절처럼 엄마가 듣고 달려오기만 하면 그쳐지는 그런 울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시편에서 수없이 불리워진 “여호와”, “나의 주”“하나님”만이 들으실 수 있는 그런 어른의 울부짖음을 우리는 시편의 탄식에서 나의 것으로 공명하며 다시 듣게 된다. (46.1)
 높은 데서 찬양하고
 다급해진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듯, 탄식 시들은 대개 하나님을 찾는 애절한 호칭으로 시작된다. 그러고는 상심이나 불평, 탄식이나 원망이 뒤따르는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시편 42편 5, 11절 참조). 혹은 자기를 이 지경에 처하게 한 대적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며(시편 42편 3절 참조), 직접 하나님께 불만과 원망을 터뜨리기도 한다(시편 42편 9절 참조). (46.2)
 이렇게 시작된 불평이나 원망은 그것을 낱낱이 이해하고 분명히 들어주실 하나님이 계심을 자각하면서 신뢰의 고백으로 바뀌고 어느 사이에 탄식은 그치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간절한 탄원으로 바뀐다. 이렇게 실컷 마음을 토(吐)하고 나면(시편 62편 8절; 142편 2절 참고) 갑자기 근심과 불안은 사라져 가슴이 후련해지고 심령은 독수리의 날개를 단 듯 짙은 구름을 뚫고 치솟는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어 현실이 달라지지 않아도 좋다. 자신을 숨막히게 했던 탄원이 접수되어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맡아 처리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는 송사(訟事)이다. (46.3)
 깊은 데 닻을 내린 심령은 동요를 그쳤고 마음은 찬양의 날개를 펴고 높은 데를 향하여 치솟는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시편 40편 2, 3절).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지어다”(시편 148편 1절). (46.4)
 이리하여 깊은 데서의 탄식으로 시작된 시편의 탄식 시들은 마침내 연약한 인간 자식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높은 데서 부르는 찬양으로 화하여 그 절정에 이른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도 높듯이, 고통과 슬픔이 깊을수록 찬양도 높아진다.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