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7. 구원에 대한 요한의 확증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에 대한 요한의 경험은 구원의 확증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독특한 공헌을 한다.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 우리의 영원한 안전의 기초라고 지적했다(참조 요 3:16). 그는 자신의 기별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진술 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요한의 전체 복음은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03.1)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로,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친교 속으로 모든 사람들을 이끌려고 하는 그들의 뜻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일치됨을 강조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개인적 굴복을 통해—예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을 통해—유효하게 되는 우리의 구원의 확증을 보장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께 집중되어 있는 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전망조차 그러한 믿음과 구원의 확실성을 위협하지 못한다. 사실 요한은 개인적인 신앙의 결심을 신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도래하는 시대의 능력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심판으로 보았다(요 5:24). 그는 왜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했는지를 분명한 어투로 말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의 말은 구원하는 신앙이 예수를 믿는 것과 그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 둘 다를 포함함을 암시한다. (103.2)
 D. A. 카슨(D. A. Carson)은 이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다: (104.1)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요한의 진술은 이 복음서의 모든 독특한 것의 심장부에 놓여 있다. ∙∙∙ 요한이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믿기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가 그들로 하여금 믿기 원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기 위해 잠시 멈추지도 않고 신앙의 긴급성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요한의 복음을 배신하는 것이다.1)
(104.2)
 요한은 영생의 확증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성하신 메시야이심을 아는 것을 통해 온다고 가르쳤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아는 것”은 단순히 지적 수용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와의 실제적 친교이며, 새로운 생명의 길—영생—이 주는 축복에 대한 현재적 향유이다. 이것이 요한의 특색이다. (104.3)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요한의 이해
 열두 제자 중 최연소자였던 요한은 예수를 향해 어린애와 같은 신뢰로 그의 마음을 열었다. 그의 영혼은 아버지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었다. 요한은 예수의 본성과 자신의 그것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그들의 충동적이고 참을성 없는 성격 때문이었다(막 3:17). 요한과 야고보는 한 때 예수께 무례했던 그 사마리아인들을 멸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제의했었다(눅 9:54). 요한은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중단시키려 했는데, 이는 그가 요한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눅 9:49). 요한과 그의 형제는 심지어 새로운 나라(왕국)에서 다른 제자들 보다 뛰어난 특별한 영예와 우선권을 구했다(마 10:35-45). “가능한 한 모든 기회에 요한은 구주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였고 야고보는 구주와의 가까운 연결로서 영예를 누리고자 갈망하였다.”2) (105.1)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이들 형제의 애착을 정화시키려 하셨다. 그는 그것을 “예수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샘에서 넘쳐나오는 것”으로 보셨다.3) 마음에 드는 지위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얻을 몫을 제시하셨다(막 10:39). 엘렌 화잇은 이것을 심오하게 설명했다: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까이 설 사람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 ∙∙∙ 의 정신을 가장 깊이 체득할 자들이 될 것이다.”4) 예수께서는 이방인 통치자들과 자신의 근본적 차이—그는 다른사람을 섬기고 축복하기 위해 오셨다(참조 마 20:25-28)—를 지적함으로써 요한과 야고보의 교만과 야망을 친절하게 책망하셨다. (105.2)
 다른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으로 요한은 점차적으로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자아에 중심을 둔 마음의 결함과 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5) 요한은 예수께서 권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를 위해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예수의 삶의 양식과 조화시키길 원했고, 또 이것—그리고 예수의 사랑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를 점점 변화시켰다.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20)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거룩하신 사랑을 자신의 마음속에 너무 깊이 느꼈기 때문에 “어떤 다른 제자보다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잘 말할 수 있었다. ∙∙∙ 주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6) (106.1)
 요한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에 달리심을 목격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욱 명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아 희생적인 사랑은 요한에게 있어서 그의 구원의 확증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되었다: (106.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단지 하나님의 선재하는 사랑에 대한 반응이었음을 충분히 깨달았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107.1)
 그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의 확증을 위태롭게 할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완전한 확신으로 심판날을 맞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 18). (107.2)
 요한의 확증의 기초
 제4복음은 요한이 자신의 믿음과 구원의 확증의 기초를 자기 속에 있는 어떤 가치가 아닌 예수의 위격과 사업에 두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음의 선언은 그의 복음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07.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107.4)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본문”으로 지칭되어 왔다(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 토라 중심적 종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종교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혹은 문자적으로 “우리 중에 장막을 치셨다”고 요한이 언급했을 때, 그는 야훼께서 광야의 성막 안에 “거하셨다”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되풀이 했다. 예수의 “영광”에 대한 요한의 인용은 고대 성막과도 연결되는데, 이는 그곳이 바로 야훼의 “영광”이 주재한 곳이기 때문이다(참조 출 40:34, 35). 요한은 하나님의 새로운 거처가 예수의 육신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즉, 어떤 외적인 광채가 아니라 거절과 십자가의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신 자의 겸손한 지상 생애에서—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품성을 보았다. 첫 세기의 마지막에서부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되돌아보면서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실제로 그의 최상의 때, 그의 “영광”“때”였다고 선언하였는데(참조 요 12:23-33; 13:31), 이는 그의 죽음이 영원토록 “많은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요 12:24). (107.5)
 요한은 자신의 영적 안전을 어떠한 종교적 철학이나 관념 위에 세우지 않았다.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 위에 그것을 세웠다. 그는 이런 말로 자신의 첫 편지서를 시작했다: (108.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 2).
(108.2)
 그의 복음서의 1:14에서 요한은 육신 안에 있는 이 말씀의 모습을 “아버지로부터 온 독생자”(NASB) 혹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NRSV)이라고 번역된 “하나이며 유일한” [헬라어: 모노게네스 monogenēs]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요점은 분명하다: 예수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이 선언하기 원하는 것은 목격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은혜의 충만하심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것은 설명되기보다는 더 잘 경험될 수 있다. 리언 모리스(Leon Morris)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은혜는 계속되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은혜는 중단이나 한계를 모른다. ∙∙∙ 은혜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끝없이 깊게 하는 경험을 뜻한다.”7) (108.3)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명(白明)하지 않다.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그것을 다른 방식들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한복음 3:16의 진술조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선하심과 호의의 계시로써 인류를 방문하도록 그의 아들을 주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 부적절한 이해는 이미 요한의 시대에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과 예수의 죽음의 목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특별한 편지를 기록했다: (1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