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편 만인을 위한 축복과 저주
 그 영감적인 히브리 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원하 시고 성화시키시는 능력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삶은 풍요롭고 의미 있고 또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104.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3, 4)
(104.4)
 하나님과 교통하는 완전한 삶
 이 시편은 의인의 생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경영하는 모든 일을 번영시킬 것이다. 왜일까? 율법의 원인과 결과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열매를 맺고 결과가 있는 것이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생명을 보존해 주는 물에 계속적으로 의지할 수 있으므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을 갈구하는 사람은 이와 같다. (105.1)
 하나님을 밤낮으로 구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의 기도와 간구를 기꺼이 들어주고자 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윗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있다. (105.2)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곁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16:8)
(105.3)
 토라를 아는 지식은 묵상을 통하여 마음속에 스며 들어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도록 고무해 준다. (105.4)
 성경 공부와 기도는 모든 축복의 길을 지속시켜 주는 방법이 된다. 성경은 하나의 씨앗 같아서 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빗방울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영적 성장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106.1)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신령한 은혜의 방법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은 이 두 가지, 성령과 기도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106.2)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물질적 번영으로 즉각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이 어떻게 이 표면적 모순과 더불어 씨름하게 되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아삽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시 73:3).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타난 바대로 악인의 궁극적 운명을 고려했을 때만 오직 쉼을 누렸다(시 73:17~20). (106.3)
 인생길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언약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의인은 악인의 운명을 알고 있다. (106.4)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시 92: 6, 7)
(106.5)
 사도 바울은 이 토라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하였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한 그는 시편 1편이 주는 기별,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비록 즉시 눈에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다. (107.1)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107.2)
 시편 기자는 그의 기별을 보다 강하게 확신시키는 데 대조법(對照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악인들이 의인들의 적대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바람에 날려 가는 겨와 같은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들이 열매를 많이 맺은 과일 나무로 비유되는 한편 악인들은 아무 실속도, 과일의 알맹이도, 또한 도덕적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비유 된다. (107.3)
 도대체 무엇이 악인으로 하여금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다할지라도 이처럼 열매 맺지 못하고 영적으로 헐벗도록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과 무관심이다. 다윗은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 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외형적으로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을 수 있고, 언약 안에 있음을 자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라는 것에 잘못 뿌리 박혀져 있을 수 있다. 침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구세주를 만나도록 준비시키러 왔을 때 그는 그의 기별과 바리새 인들과 사두개 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 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마 3:8, 9). 성령의 열매 없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성화된 생애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공헌하는 백성의 모든 종교적 주장은 무가치하며 오직 수치로 인도할 것이다. 이런 일이 어느 누구도 피할 길 없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나타날 것이다. (107.4)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이다”
(시 1:5)
(108.1)
 시편 1편은 악인들이 심판의 때에 멸망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와 비교되는 표현이 “의인의 회중”이므로 성소에서 행하는 이스라엘의 정규적(定規的)인 심판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신 17:8, 9). 시편 7편26편은 이같은 심판을 위한 성결한 기도서를 대표한다(시 7편 이하). 여기에서 완전한 뜻은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계시적 측면을 의미한다. 거기서 악인들은 의인들이 그들의 “업을 누릴”(단 12:13) 동안 숨을 곳도 없이 그들의 도덕적 벌거벗음이 완전히 백일하에 드러나 노출되고 말 것이다. (108.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비유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분리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109.1)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값이 있으리라”(마 13:49, 50).
(1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