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편 만인을 위한 축복과 저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또는 계획, 사상]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또는 생의 방법]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1)
(99.1)
 여기서 악인의 길은 죄에 완전히 얽매인 생애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생각, 즉 마음은, 깨끗하지 아니한 샘이 시냇물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자신들의 행위와 언어를 그렇게 타락시킨다. (99.2)
 이런 삶의 길에서 떠난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악인의 인생길에는 평화와 행복, 그리고 축복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복 있는 사람은 어디서 그의 기쁨을 찾는가? (99.3)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99.4)
 하나님의 율법을 두 번이나 언급하는 이같은 독특한 묘사는 우리가 신약에서 보듯 율법주의적인 바리새 인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멍에나 짐이 아니다. 반대로 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다른 시에서 기술한 대로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100.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8)
(100.2)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1) (100.3)
 이같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관한 간중은 옛 성도들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을 경험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얻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내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36:26, 27과 비교).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거룩한 법과 뜻은 결코 마음에 깊은 감동을 찾을 수 없는 외적 명령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마음의 (100.4)
 깊은 소망 가운데서 새롭게 되거나 변화를 입는 것이다. 율법을 다루는 시편들은(시 1, 19, 119편) 한결같이 바울이 표현했던 신앙의 기쁨을 증거하고 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이것은 바울이 죄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소유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신앙이 이스라엘의 시인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해 줄 뿐이다. 그리스도가 당시 랍비적 유대주의에서 상실된 것을 회복시켰으므로 시편은 구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100.5)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요 15:10)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영적 핵심과 동기를 말씀하고 계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같은 열정이 시편 1편에서 의인의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였다(2절). 그는 하나님을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호 12:9) 자신의 구세주로 알았고, 하나님의 율법(실제로 오경을 말함)을 당신의 은혜의 선물로 여겼다. (101.1)
 토라(Torah)라고 하는 낱말의 완전한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토라는 하나님의 가르침 또는 교훈을 뜻하는데(시 78:1과 비교), 그것은 십계명 그 자체 이상의 뜻이 있다. 토라는 또한 하나님의 믿게 하시고 신뢰케 하며 회개하고 자복하게, 그리고 당신의 성소에서 당신과의 화합을 구하게 하시는 가르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율법과 구원의 은혜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학자들은 토라를 도덕 경건으로서의 율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며 너무 협소한 해석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101.2)
 시편 기자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언약과 분리된 도덕률 자체로 보는 관습이 이상할 뿐이었다. 그들은 결코 “율법” 자체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율법” 또는 “여호와의 율법”(시 1, 19, 119편 참조)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증거”, “교훈”, “계명”, “규례”, “약속”, “말씀”, 심지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와 같은 용어들을 토라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할 때는 언제나 마음속에 토라를 성소 예배에 집중된, 분리할 수 없는 전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토라가 율법적 측면과 구원적 측면이 따로 있긴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피차 마치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봉사를 통하여 도덕률과 구원의 은혜를 분리할 수 없는 역학적 상호 관계로 한데 묶으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언제나 언약의 율법이었다. 이 율법의 위치와 그 기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소 안에 있었다. (102.1)
 토라 안에서의 기쁨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적 유대주의의 대표적인 특성은 예레미야의 새언약에 대한 개념과 경험이 잊혀져 버렸다고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도덕률은 보통 구원의 방법 공로를 얻는 방법으로 생각되어졌으므로 자기 의(自己義)의 위험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열렬한 랍비로서의 경험이요, 자기 평가의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열성적인 바리새인이었음을 고백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6). (102.2)
 이와 반대로,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모든 죄에 대한 자의식 가운데 살았으며 하나님의 받아 주시는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 생애를 보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토라에서 흠 없이 정결하며 넘치는 자비 가운데 계시는 거룩한 분을 경험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것이다. (103.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시 19:7, 8)
(103.2)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6, 97) (103.3)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103.4)
 그 시인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율법을 단순히 기쁨의 만족으로만 묵상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토라를 정신적 기쁨 이상의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즐거워했다. 그들은 자신의 구세주를 기쁘게 하고 영화스럽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104.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9~11, 105)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