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 부 왕의 인격체 (1:1-4:16) 2. 봉사를 위한 왕의 준비 (3:1-4:16)
 그러는 사이에 마태는 ‘엘리야’ 상징을 그가 구약에서 수집한 전주자에 대한 두 번째 시사(示唆)와 짝을 짓는다. 3절에서 마태는 이사야 40:3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을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로 올 것이라는 예언으로 보고 있다. 이사야의 묘사에 포함된 장면은 왕이 방문할 것을 예상하고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마태는 그것이 요한의 역할이라고 제시한다. 그는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69.1)
 마태가 이사야 40:3을 사용한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그 예언자의 말의 뜻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평탄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말하는 데 반해, 마태는 “하나님”“그” 즉 예수로 바꾼다. 그처럼 마태의 독자들은 그가 앞서 1:23에 제시했던 가르침—즉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을 또다시 받고 있는 것이다. 능숙한 솜씨로, 우리의 기자는 그의 복음서의 주요 주제들을 깊이 각인(刻印)시키고 있다. (69.2)
 요한의 의복과 음식에 대한 마태의 전반적인 묘사는 단순성의 모습이다. 그의 생활 양식은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는 자의 그것과 잘 조화된다. (69.3)
 그러나 침례자 요한의 생활 양식이 단순했을는지는 몰라도 그의 기별은 복합적이며 또한 심오하였다. 그 기별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요한의 기별은 회개하라는 초청이다(2절). 바로 이 초청은,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 모두에게 그들의 길을 고치고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과 대결하는 것으로 그의 봉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엘리야의 반열에 다시 한 번 요한을 올려놓는다. (69.4)
 회개(repentance)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마음을 바꾸다” 혹은 “자신의 사고 방식을 바꾸다”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회개와, 신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 회개의 뜻은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변화된 생활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의 청중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8절)고 요구한다. 어떤 것이 바르다고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요한은 그의 청중들의 생활 전반에 걸친 태도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이 변화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69.5)
 침례자 요한이 전파한 두 번째 기별은 “천국이 가까웠다”(2절)는 것이다. 그 선언은 예언의 성취가 가까웠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예를 들어, 미 4:7; 슥 14:9을 보라)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 시대의 끝이 이르렀다. 다음 시대가 곧 시작될 것이다. 하늘 왕국은 곧 지상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올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곧 지상의 국가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될 것이다. (70.1)
 요한 이전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 주제에 요한이 공헌한 것은 그 왕국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70.2)
 가까움 그 자체는 그리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유대인들은 왕국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벌하시고 의인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심판의 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심판 요소는 침례자 요한이 전한 세 번째 기별의 필수적인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장차 올 진노”(7절),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음(10절), 그리고 “알곡은 곡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으로서 오실 분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12절). (70.3)
 요한은 다가오는 왕국의 임박함과 장엄함에 비추어 그의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내라고 촉구한 것이다. (70.4)
 불행히도, 요한이 보고 있다시피,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해야 될 필요가 있는 회개와, 맺어야 할 필요가 있는 열매의 의미, 그 어느 것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구원의 조건들을 오해해 왔다. 이것은 요한이 전한 두려운 기별의 네 번째 내용, 즉 종교적 가계(家系)와 혈통의 무익성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아브라함의 자손 됨은 어떤 사람도 다가오는 심판을 통과하도록 해 주기에 충분치 못할 것이다(9절).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저 위대한 부조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70.5)
 유대 백성들만이 그런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여러 교파로 나뉜 많은 그리스도인들(즉, 천주교, 침례교, 재림교 등)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품어 왔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들은 그릇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9절) 하실 수 있다. 요한의 시대에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의존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있어서도 어떤 특정 단체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요한에 의하면, 참으로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마음과 좋은 열매 맺음으로 그 특성이 나타나는 생애이다. (71.1)
 그와 같이, 요한의 기별의 다섯 번째 측면은 고백과 침례이다(6절). 백성들이 그의 설교에 반응을 나타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다(5절). 침례자 요한의 모습 속에서 그들은 엘리야와 선지자들의 능력과 특성들을 감지했다. 그들은 요한의 인격과 그의 기별 모두가 진실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그를 찾아가 그가 베풀어주는 침례를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한으로부터 정죄를 당할 뿐이었다. 요한이 아브라함에 관하여 설교를 한 것은 그들이 도착한 후였다. 분명히 평신도들과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그들의 교단에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것을 신뢰하고자 하는 경향이 특별히 많았을 것이다. (71.2)
 요한은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침례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어떤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유대교에 입교할 때 통상적으로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요한은 모태 유대인들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촉구함으로써 그 과정에 거보(巨步)를 내딛었다. 유대인들이 침례를 받은 전례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풂으로 요한은 악명을 더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71.3)
 사실상, 그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침례의 정결케 하는 물로 그들의 과거를 깨끗케 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6절). (71.4)
 이런 고백과 침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의 일부였음에 틀림없다. 급속하게 다가오는 왕국의 도래에 비추어, 요한은 이스라엘의 신자들에게 그들의 옛적 사고 방식들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실행에 옮기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72.1)
 침례라는 주제는 요한의 최고의 주제-예수-에게로 우리를 데려간다. 요한에 의하면, 그의 물 침례는 다만 그의 뒤에 오실 분이 베풀 더 중요한 침례에 대한 상징적 예표일 뿐이었다. 오시는 분은 단순히 물로 침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11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혜로 침례를 베풀 것이며, 그는 또한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의 불로 침례를 베풀 것”(Bruner, 1:80)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마태복음 3장의 전반적인 문맥과 특히 12절의 구체적인 내용과 잘 조화되는 것이며, 12절에는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께서 까부르는 갈퀴를 휘두르면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또한 계 14:14-20을 보라). (72.2)
 왕이 기름부음을 받음
 마태복음 3장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들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러 요한에게 나오시는 것이다. 결국 요한은 예수를 그가 베푸는 침례보다 더 우월한 침례를 베푸실 분으로 이미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던가?(11절). 그런데 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성인이 된 그가 맨 처음으로 하는 일로서 침례를 받으러 나타나신 것이다. 요한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72.3)
 그렇다면 이제 요한이 베푼 침례의 의미를 고찰해 보라. 그의 침례는 고백이 동반되는 회개의 침례인데, 여기 회개나 고백 그 어느 것도 할 필요가 없는 분이 침례를 베풀어 달라고 나타나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해 볼 때, 요한이 예수께, 자신이 그에게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지, 그가 자신에게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 이의를 제기하는 것(14절)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73.1)
 그러나 예수께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답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는 요한에게 이제(now) 허락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은, 그들의 관계가 예수의 주 되심(Lordship)이 한층 더 드러나게 될 미래에 변화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침례자 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고 말씀하신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마태만 포함시킨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