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9장 실패와 성공 (민수기 20~21장)
 “호르마”라는 이름은 “완전히 파괴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와 동일한 어근에서 유래되었다. 이 어근은 여호와께 대하여 개인들이나 사물들이 되돌릴 수 없도록 완전하게 바치는 것을 가리킨다. 즉, 그것들이 성소에 드려지던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던지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레 27:21,28,29; 신 2:34; 3:6; 7:2 참조). 이같은 헌신의 본질은 왜 아간이 후일 곤란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즉, 그는 파괴를 목적으로 여호와께 바쳐진바 된 여리고로부터 물건들을 취함으로써 신성모독을 범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과 함께 멸망을 당했다 (수 7장). (160.4)
 특정한 때와 장소들에서, 고대 이스라엘이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였음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와 같은 전적인 파괴를 명하시거나 허락하셨다. 그분은 성전(聖戰)을,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백성을 멸망시켰을, 그리고 그들의 죄악의 잔이 찼던, 이스라엘의 특정 원수들에게 국한하셨다 (창 15:16 참조).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 끝에 악한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처럼 (계 20장) 그들을 불로 진멸시켜 버릴 수도 있으셨다(창 19장). 그러나 그분은 그분을 신뢰하도록 그들을 시험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분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선택하셨다(삿 3:1-4 참조). (161.1)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전쟁은 여러 면에서 “지하드”(성전)와 유사하다 (서방세계가 싸우고 있는 소위 테러리즘을 포함하여). “지하드” 또한 종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의 신이 승인하였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힘닿는 데까지 섬멸하는 일에 관여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정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이단자들”에 대한 지하드는 시간과 장소의 한계가 전혀 없다. 그에 반해서, 성경의 하나님은 직접 거룩한 전쟁을 통제하셨으며, 그것을 성경적 명령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국가가 그 영토를 취하고 거기 정착해가는 시기의 팔레스틴에 그것을 국한하셨다. 하나님의 쉐키나의 임재가 더 이상 이 지구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는 나라가 아니라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실제 군사적 의미에서 적법한 그리스도교 성전(聖戰) 같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161.2)
 쳐다보고 살라
 에돔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민 20:18-21 참조), 그리하여 가나안 동쪽 국경으로 가는 여행길이 크게 늘어나고 말았다. (162.1)
 백성들은 짜증이 나게 되었고, 하나님과 모세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데리고 나와 물도 없고 음식도 없는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다는, 그들이 늘상 하던 불평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제공하시는 만나에 대한 혐오감도 추가하였다. “우리는 이 초라한 음식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노라”(민 21:5, Tanakh; 민 11:6 참조). (162.2)
 다베라에서 여호와께서는 불을 보내어 불평하는 이들에게 경고하셨었다(민 11:1). 지금 그분께서는 그 백성들을 벌하시기 위해 “불뱀”을 보내셨고, 물린 사람 중 다수가 벌써 죽었다. “불”(fiery)이라는 말은 그 뱀의 독이 유발시키는 불타는 듯한 고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베라에서처럼, 공포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며, 모세는 그렇게 해주었다(민 21:6,7; 민 11:2 참조). (162.3)
 다베라에서의 벌어진 사건 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즉시 그 불을 끄셨지만(민 11:2), 이번에는 치료가 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게 만드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162.4)
 오로지 “놋뱀을 쳐다”볼 때에만 회복될 것이다. 물린 어떤 사람이 그분의 종 모세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완전히 거리낌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저런 류의 어리석은 짓에 넘어가서, 청동조각을 단순히 쳐다봄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계속 고통을 당하다가 죽을 수 있다. 선택은 여러분의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마음을 바꾼다면, 그저 쳐다 보아라. 적어도 믿음에게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하여 믿었을 경우 얻을 엄청난 유익에 관하여 이야기 하라! (163.1)
 놋뱀은 그 속에 아무런 마법적 능력도 없었다(후일 사람들이 그것에게 경배한 실수를 저질렀긴 하지만[왕하 18:4]).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뱀에게 물린 상처로부터 치료를 가져온 것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는 일에 나아만의 피부병의 치료가 달려 있도록 하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왕하 5장), 오로지 그분께서 기적이 그 행동에 의존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나음을 얻기 위하여 이와 같은 행동들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었다(참으로, 나아만도 그렇게 생각했다![왕하 5:11,12]). (163.2)
 하지만 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고 있었던 뱀의 형상을 만들었는가? 한 가지를 말한다면, 백성들은 뱀을 대표하는 형상을 바라봄으로 그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보호자 여호와를 거절함으로써 그 뱀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자초했었다. 하나님께서 여행길 내내 수 년 동안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진작에 수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뱀에게 물리거나 전갈에 쏘였을 것이다(신 8:15). (163.3)
 이 놋뱀의 중요성과 의의는 그것이 다가 아니다. 어느 날 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3-16). (164.1)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는 물려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믿기로 선택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고, 그리고 그분께서 놋뱀의 자리에 달려 계신다. (164.2)
 예수께서는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그분도 “들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의 법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린 사람은 “여호와께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신 21:22,23). 여러분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으셨다는 의미를 회피하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대신에, 바울은 정곡을 찔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164.3)
 그러나 왜 뱀이 그리스도를 대표해야 하는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는 피조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뱀은 죄와 죽음을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창 3장)?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164.4)
 “그것을 상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되셨다! 그분은 지구상에 살았던 수십억의 사람들의 모든 악한 정욕들과 이기적인 타락의 짐을 지셨다. (동서고금 여기저기서) 그분에게 모여 쏟아지고, 그분이 모든 악의 화신(化身)인양 그의 것으로 동일시된 저 압도적인 비애의 홍수와 더불어, 그분은 모든 죄와 그 모든 결과들을 일소(一掃)하시기 위해 자신을 파멸에 내어주셨다.”2 (165.1)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에 승리를 거두며 진군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뱀에게 물린 상처와 ‘믿음 없음’이란 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제가 성공적이었음에 틀림없다. 첫 번 째 승리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을 믿은 것과, “우물”을 뜻하는 브엘에 우물을 팜으로써 그분과 협력한 것을 포함하였다(민 21:16-18). 믿음, 협력, 그리고 물이다. 그 일이 얼마나 원기를 북돋워주었을까! (165.2)
 그 다음 승리들은 요단강 동쪽 지역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 대하여 거둔 주요한 승리들이었다(21-35절). 이 두 왕들은, 가나안 군대가 강대하였고, 옥이 거인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군대를 패배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였다(신 3:11).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영토를 취하고 점유하였다. 이제 여호와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진기지를 갖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그들은 승승장구하였다! (165.3)
 참고
 1. Max Lucado, When God Whispers Your Name (Dallas: Word, 1994), p.52.

 2. Roy Gane, Altar Call (Berrien Springs, Mich: Diadem, 1999), p.77. (1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