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9장 실패와 성공 (민수기 20~21장)
 이 백성들에 대하여 모세는 놀랍도록 겸손했고, 인내했고, 용서성이 많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 대신 그를 통하여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그분의 제의를 그는 두 번이나 거절했었다(출 32:10-13; 민 14:12-19). 그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시켜 달라고 요청하면서 중보하기까지 했었다(출 32:32). 지금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반석 앞에 서서, 그들의 은혜로우신 주님을 거듭 거듭 배척하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좌절시켜왔던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들의 누적된 이기심, 우둔함, 배은망덕, 그리고 배반에 대한 기억들이 이 위대한 지도자를 압도했다. (155.1)
 그는 갑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맹렬할 비난을 퍼부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0,11). (155.2)
 어쨌든 기적은 일어났다. 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 즉 모세와 아론의 전적인 신뢰의 결과로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였을 그 이적이 아니었다. 말하는 대신, 모세는 그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후려쳤다. 아론은 이 기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훨씬 더 나쁜 것은, 발생한 것을 통해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기별이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 기적의 공(功)을 돌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론과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고 백성들 앞에 그분을 거룩한 분으로 대표하는 일에 실패했다. (155.3)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12절). 그들은 애굽을 떠난 신실치 못한 성인 세대들과 함께 광야에서 죽을 것이었다. 민수기 20장 11절은 모세가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바위를 쳤다. 이것은 그것을 위해서는 동물 희생 제사가 아무런 구제책도 마련하지 않은 “고압적인”(high-handed, 손을 높이 쳐든), 혹은 반항적인 죄를 가리키는 말이다(민 15:30,31). 비록 모세가 여호와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분의 선고는 최종적이었다(신 3:23-27). (156.1)
 아론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40년째 되는 해에 123세를 일기로 먼저 죽었다(민 33:38,39).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산으로 불러올려 그분께 가까이 오도록 하셔서 죽게 하심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 아론이 죽기 전에, 모세는 형의 대제사장 의복을 벗겨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입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한 제의(祭衣)가 아론의 사체로 인해 오염되는 것을 막았다. 모세와 엘르아살이 아론없이 산 아래로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 동안 애곡하였다(민 20:23-29). 한 달의 기간은 그들에게 자신들을 되돌아 볼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죽었어야 했지만, 그 대신, 그들의 제사장이며 중보자였던 사람이 죽은 것이다. (156.2)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이었고, 모세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역사 상 어떤 사람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웠다(민 12:7,8; 신 34:10). 그들이 거룩한 신뢰를 저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심지어 모세와 아론조차 도 아끼지 않으신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하나님의 사업의 지도자들을 숙연케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설계하시는 길로부터 벗어나는 데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우리의 특권과 책임과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책임도 더 커진다. (156.3)
 학비를 벌기 위하여 캘리포니아에서 공사판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높은 보수를 받는 목수와 나 같은 노동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전자는 일을 잘못하면 그것을 바로 잡는데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일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물론, 역사가 풍성하게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 지도자는 목수의 그것보다 수백만 배나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모세가 저지른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국가 지도자로서. 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한 방식은 그들의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들의 믿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57.1)
 그와 같은 지도자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영향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려면 없어서는 안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영향을 준다 (엡 2:8,9). 우리는 그런 사실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함으로써 믿음을 육성할 기회를 굳건히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마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양 불평하고 있는가?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는 혼자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가? 아니면 리더십의 부담이 “그분의 어깨들에 놓여질” 것이기 때문에 기도로 여호와를 찾도록 다른 이들을 초청하는가(사 9:6)? (157.2)
 우리는 답은 주지 않으면서, 성숙하지 못한 마음으로 의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불가지론자가 되게 하고 있는가? 이런 가르침을 한 2년 정도 경험한 후에, 한 “그리스도교 대학”에서 신학 전공을 하고 있는 내 친척 중 한 사람은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지 믿고 있지 않은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면, 확고한 믿음의 뼈대를 개발시키는 방법을 보여 주어, 사고력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해결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불가피한 의심들과 의문들을 추려낼 수 있게 해주고 있는가(신 29:29)? (157.3)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세와 함께 그 바위 앞에 서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과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일깨워주는 지팡이를 꼭 붙잡는 한편,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생명수”를 받을 수 있도록 그분께서 우리로 말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을 듣도록 하자(요 7:37,38). 그 물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다. “다 같은 영적인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좇아온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셨다”(고전 10:4, NASB). (158.1)
 그 반석이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신약성경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한가지 요점을 제시한다. 즉, 생명을 주는 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한번만 치라고만 말씀하셨을 뿐이다. 르비딤에서(출 17:6). 이것은, 궁극적 생명(영생)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다(히 9:28)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 때 이래로, 우리는 생명을 받기 위하여 오직 그분께 말만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58.2)
 성전(聖戰)
 미국에서 운전하던 한 남자가 십대 자동차 편승 여행자(히치하이커)를 태우게 되었다. 몇 마일을 달린 후에, 그 소년은 갑자기 칼을 꺼내 위협하면서 운전자의 지갑을 요구했다. 운전자는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면 챨리가 안 좋아할 걸.” 어리둥절한 그 소년은 칼을 그에게 더 가까이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지갑을 내 놓으라고!” 재차 운전자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면 챨리가 안 좋아할 걸.” (158.3)
 바로 그때 도둑질을 꿈꾸던 이 소년은 그의 목 뒤에 뜨거운 입김을 느꼈고, 저음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뒷좌석을 힐끔 둘러보았다. 공포에 질리게도 그는 운전자의 애완동물인 커다란 흑표범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필사적으로, 그 소년은 운전자에게 애원했다. “저를 여기서 내려주세요.” 운전자는 속도를 줄였고, 소년은 자동차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중인데도 탈출하였다. 그러고 나서 죽어라 도망쳐서 길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 재미있어하는 운전자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 활기차게 움직였던 그 소년의 엉덩이였다. (159.1)
 이 십대 소년은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운전자는 챨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아랏의 가나안 왕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뭔가 다른 것, 정확히 말해서 누군가를 갖고 있었다. 가나안 왕이 믿지 않았던 것, 즉 여호와. (159.2)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로부터 처음으로 가나안에 접근했을 때, 그들이 주님과 협력했더라면, 남쪽으로부터 진격하여 약속된 땅을 빼앗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민 14장). 거의 40년 후에, 남쪽으로부터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은 방법이 아니었었는데, 왜냐하면 분명히 그곳의 정치적 상황이 변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단강 건너 편에서, 동쪽에서 가나안을 침공하기 위해서 훨씬 더 긴 길로 가야했다. (159.3)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에 놓인 한 가지 장애물은 에돔 왕국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곱/이스라엘의 쌍둥이 형제인 에서의 후손인 에돔 사람들과 친척관계였다(창 25장; 36장). 그래서 모세는 에돔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형제로서의 어떤 환대도 없이그는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그의 거절을 뒷받침하였다(민 20:14-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공격하는 대신, 그들과의 대결을 피하여 그저 돌아섰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에돔에게 그 지역을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도발을 감행하거나 그들의 땅을 조금이라도 점령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신 2:5). (159.4)
 그러나 아랏의 왕이 여행 중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고 그들 중 일부를 사로잡아 포로로 삼았는 때는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그와 그의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혈연 지간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이었고, 가나안 땅을 넘겨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아내야 할 백성들에 속해 있었다(출 34:11-16). 이것은 그 왕의 마지막 실수였다. (160.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민 21:2,3; 출애굽기 17장의 아말렉과, 비슷한 형벌을 받은 삼상 15장을 참조하라). (160.2)
 백성들이 하나님 없이 가나안을 강습하려고 시도했을 때 아말렉 족속과 가나안 족속에게 패하여 호로마까지 도망갔었던 것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모든 실패들 후에(민 14:5), 여기 중요한 믿음의 승리가 있었다. 이 경험은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이 약속된 땅을 빼앗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