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9장 실패와 성공 (민수기 20~21장)
 자비의 힘
 민수기 19장이 사체 부정 처리에 관한 지시 사항들을 제공한 후, 20장은 더 많은 사체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죽는 사람이 공동체의 많은 사람이 아니라 미리암과 아론이었다. 모세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는다. 애굽을 떠난 성인들 중 오로지 갈렙과 여호수아만 끝까지 살아남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민 14:30; 26:65). (150.1)
 미리암이 먼저 죽었다(민 20:1). 성경은 그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지 못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과거 하세롯에서의 그녀의 불충성 때문이었으리라(민 12장). (150.2)
 미리암이 죽고 난 후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 특히 모세를 비난했다(민 20:2). 이것은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 르비딤에서 일어났던 것과 유사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신가 아닌가 의심을 품었었지만, 그분께서는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친 후에 즉시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보여주셨었다(출 17:1-7). (150.3)
 이번에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들의 언쟁에 또 다른 추한 모습을 추가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3-5). (150.4)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저 고라, 다단, 아비람, 그리고 여타 반역자들과 운명을 같이 했었으면 하고 바랬다(민 16,17장). 사실상, 그들의 말들 가운데서 다단과 아비람의 증오 섞인 태도가 메아리친다(민 16:13,14). (151.1)
 심란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세와 아론은 성막으로 가서 엎드렸다. 그러자 이전 반역의 경우들에서처럼(민 14:10; 16:19,42),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민 20:6). 국가 전체를 거의 절멸시킬 뻔 했던, 앞서 민수기에 기록된 가중된 하나님의 형벌 이후에 등장하기에, 이것은 매우 불길하였다(민 11;14;16장).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결국 고갈된 것인가? (151.2)
 이번에 일어난 것은 우리가 백번이고 마땅하다고 기대할 어떤 것, 즉 많은 사람 혹은 백성들 모두의 죽음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지팡이”를 취하고, 백성들을 모으고 바위를 향하여 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그 바위는 모든 백성과 그들의 가축들에게 줄 물을 기적적으로 낼 것이었다. (151.3)
 그게 다인가? 백성들에게 아무런 형벌도 내리지 않는? 그저 르비딤에서 있었던 기적의 반복? 악을 선으로 갚는 순수한 자비? 정확하다.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놀란 적이 없지만,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신이 멍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게 문제된 적이 결코 없다. 사실 그것은 언제나 옳아 보였다. 소돔에 내린 벼락들. 고모라에 내린 불.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홍해가 애굽인들을 삼켜 버렸다. 자업자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뻣뻣해진 목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40년 동안의 방황을? 나 같아도 그렇게 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말하면 잔소리. 나에게 있어서 징계는 받아들이기가 쉽다. 이해하기에 매우 논리적이다. 감당할 수 있고, 적절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결코 그렇지 않다.”1 (151.4)
 우리는 “놀라운 은혜”(자비로운 주 하나님)란 찬미를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당연시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은혜를 감탄스럽도록 놀랍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과분하고, 그러므로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는가? 한 가지를 말하자면, 자비는 그분의 사랑의 품성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출 34:6,7). 또 다른 것을 말하자면, 자비는 완고한 마음의 저항을 깨뜨릴 “엄한 사랑”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152.1)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복수를 수행할 권리와 힘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다. 백성들이 이것을 깨달았으므로, 그분께서는 백성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예상치 못한 친절로 대하심으로써 되갚으시는, 시내 이전 접근 방식으로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지금 그분의 은혜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젊은 세대들을 가르치시는데 초점을 맞추고 계셨다. (152.2)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쾌한 행동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의도된 바, 친절로 적들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접근 방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효력을 나타낸다. 얼마 전, 네브라스카 주 링컨에 살고 있는 유대인 찬양지도자와 그의 아내가 음란하고 반유대적인 전화 공세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 전화는 인종차별단체인 쿠 클럭스 클란(Ku Klux Klan)의 한 지도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부부는 그들을 향해 이런 식으로 증오를 퍼부은 범인을 찾기 위하여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전화를 건 못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사람은 장애를 갖고 있었고 식료품을 사기 위해 쉽게 외출할 수도 없었다. (152.3)
 이 유대인 부부는 그 KKK 지도자를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문을 연 그 사람은 너무 놀라서 그들을 집안으로 초청하였다. 부부는 계속 방문했고,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의 우정을 받아들였다. 그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찾는 대신에, 그들은 그의 유해한 태도를 뿌리 뽑았던 것이다. (153.1)
 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앨라바마 주 주지사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는 미국의 흑인평등권 요구 운동을 방해하려고 시도헸다.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의 총에 맞아 그는 정상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정치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생애의 말년에, 그가 자신을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를 간병했던 그 흑인이 너무도 부드러운 친절로 그를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인종차별주의를 포기했다. 편견은 이 같은 사랑의 분위기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153.2)
 물론, 모두 사람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은혜를 모르고 터무니없이 우리의 원수가 되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복수가 수행되도록 하는 일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일을 완벽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 (153.3)
 기적과 실수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민 20:9). 그것은 모세 자신의 지팡이였음(11절), 꽃이 피고 살구열매가 열리고, 또한 모세가 성막에 두었던 아론의 지팡이는 아니었다(민 17장). (154.1)
 성소에서 “여호와의 앞”에 보존되었음에 틀림없는 모세의 지팡이는 애굽에서 이적의 도구였으며,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로부터 구출하신 도구로, 르비딤에서 반석으로부터 물이 나오게 한 기적의 도구로, 아말렉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는 도구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출 4:7-10; 14장; 17장). (154.2)
 모세의 지팡이는 그의 신원을 대표한다(창 38:18 참조). 그가 왕이었다면, 그것은 왕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홀이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불렀다(출 17:9). 그것은 모세에게 속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속했다. 모세가 이 놀라운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마어마한 일이 이제 막 시작되리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바위를 쳐서 그들에게 다시 물을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쳐서 죽게 할 것인가? (154.3)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모세와 아론이 그저 지정된 반석에게 말하고, 그러는 동안 모세는 주님께서 과거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상기물로서 지팡이를 쳐들고 있기를 원하셨다(민 20:8). 이 이적에 아론을 포함시키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앞으로도 계속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 아론의 제사장직에의 지도력을 다시 한번 확증시켜 주실 것이었다. 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르비딤에서의 그것보다 더욱 위대한 이적이 될 것이었다. 모세가 거기에서 바위를 쳤을 때(출 17:6), 그 타격이 지하 샘물을 틀어막고 있는 바위 표면을 산산이 부숴뜨렸을 수도 있다. 그 일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랬다면, 그 기적은 정확하게 바른 곳을 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물질을 움직이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물리적 결과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