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지만 가난함
 비록 야고보가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었지만, 서신을 통해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을 끌었던 자들은 부자들이다(2:1-7; 4:13-17; 5:1-6). 그의 중심 강조점은 그들의 몰락이다(1:10, 11; 4:14; 5:1-3). 그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결과들을 정확하게 대조하기 위해서 이를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63.2)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자에 관한 야고보의 명백한 관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서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 서신을 엄밀하게 읽는 것 대신에 많은 사람들은 현 시대에 사회 속에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해석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난해 구절들을 난해한 문맥 안에서 읽을 필요가 있으며, 그것들에게 우리의 사상을 부여함 없이 그것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말하도록 해야 한다. (63.3)
 이 구절에 대하여 오랫동안 야기되어 온 문제들 중에 하나는 이 부자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님으로 그 구절은 교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은 교인이며 그의 부함은 1:2에 언급된 시험으로 인해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해석이 인식에 실패한 것은(혹은 단지 무시한 것은) 부함이 사라질 것이 아니고 부한 사람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10절). (64.1)
 문제는 부자가 교인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이것은 문맥과 아무 관련이 없다. 사실 야고보는 부자를 한 부류로써 혹은 한 개인으로써 다루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여기서의 주제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가난함과 부함을 대조하고 있다. 전자는 높아지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랑할 수 있다. 후자는 낮아지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높음—낮아짐이 반전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성 속에서 그는 가난한 자에게 그들이 비록 천하고 낮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말로 귀하고 높임을 받을 것을 깨닫게 함으로 소망을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리심으로, 부자들은 내리시고 비천하게 하신다. (64.2)
 사람들이 2:5-75:1-6 같은 구절을 읽을 때면, 야고보는 어떤 부한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자들에 대한 야고보의 위협은 의로운 부자가 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다. 그가 부자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그의 단어와 억양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의 언어에는 부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어떤 시늉도 없다. (64.3)
 내가 강의 시간이나 교회에서 이 구절이나 비슷한 구절들을 다룰 때마다, 늘 일어나는 질문은, ‘어떻게 야고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는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베다니의 마리아, 바나바 등의 부자도 모르는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냈을 때 정말 그런 의로운 부자들이 있었는가? 그들은 모든 재산을 나누었고, 예루살렘에서 고통받는 무리의 한 일원으로 속하지 않았는가(행 2:42-47; 4:32-37)? 이런 경우라면, 왜 야고보가 부자들에 대해 좋은 말을 사용치 않았는가가 명백해진다. 실제적으로 재산을 공유하는 데 실패한 자들은 그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64.4)
 그의 요점을 더욱 힘있게 만들기 위해, 야고보는 그의 심상을 위해 이사야 40:6-8을 떠올린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지만 야고보는 이사야가 한 것처럼 소망의 말로 끝맺지 않는다. 그는 급소를 찌르는 듯한 강력한 심판적 언어로 전개한다. (65.1)
 야고보는 모든 인간에게가 아니라 부자에게만 이르는 숙명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그것이 야고보 자신이나 이사야는 아니었지만 팔레스틴에 사는 다른 모든 자들은 매우 익숙한) 예증을 취했다. 그는 무상함에 관한 적절한 심상인 꽃과 푸른 풀을 사용한다. 그 모습은 간결하지만 찬란한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현상인— 팔레스타인의 봄의 모습이다. 아네모네, 싸이클론, 백합 같은 꽃들이 풍부하게 피어나지만 팔레스타인의 봄은 몇 주 안에 가버린다. (65.2)
 우리의 저자는 그때 거의 팔레스타인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른 현상을 그려낸다. 그는 해와 그리고 뜨거운 바람(1:11)을 이야기한다(1:11). (주목하라, 나는 야고보가 묘사한 것이 “함께”(with)보다는 “그리고”(and)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 믿는다.) 요점은 파괴적인 자연력으로써의 태양과 봄 동안 사막의 남동쪽에서 주야로 쉴 새없이 불어닥치는 맹렬하고 폭발적인 열풍(the sirocco)에 있다. 이 열풍은 단지 며칠만 불어닥쳐서 경관의 색깔을 푸른색에서 갈색으로 변화시키며, 어린 풀들과 꽃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야고보는 부자를 이런 꽃들에 비겨서, 힘있고 강하며 권세와 아름다움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영광의 높이가 순식간에 갑자기 그리고 완벽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 생각한다. (65.3)
 다시 한번, 우리는 여기서의 문제는 부(wealth)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만 한다. 부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심판이 이르는 곳은 부자이다(10절). 야고보가 부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나는 침묵의 웅변이라 여긴다). 그의 문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던, 그랬을 것처럼 보이는, 부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는 이 서신 2장5장에서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은 그들이 사업적 이익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들이 상업적 주문와 기획에 참여하고 있을 때 임할 것이다. 이것이 4:13-17에 제기된 문제이다. (65.4)
 야고보서에서는 부자들의 상황이 정반대로 되거나 혹은 될 것이 명백하다. 신용과 안전의 면에 있어서 사물들은 놀랍게도 반전된다. 가난한 자들도 또한 뒤집어진다. 비천한 환경과 가난함에 있다가 그들은 높은 지위를 받는다. 심각한 경제적 시련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굉장한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다. 그들은 대반전이 일어날 것을 보증받는다. 그들의 가난함이 1세기의 부자들에 의한 압제의 결과로 이르러 온,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고 계시며, 변화시키실 것이며, 모든 것이 반전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66.1)
 비록 야고보의 부자들에 대한 귀에 거슬리는 관점으로 인해 신약에서 소외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선포가 그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사복음서에서,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이 높임—낮아짐 모티브가 명백히 나타난다. 그의 복음서의 초반부에서, 누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난한 자를 높이며, 권세있는 자와 부자를 심판하는 것으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마리아 송가로 알려진 노래에서 마리아가 부른 것이다(눅 1:46-55):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52, 53절). 이는 또한 누가가 평지 설교로 제시한, 산상설교의 누가 역본에도 사실로 나타난다(6:17-49).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 것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단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라고 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서는 부족하지만, 야고보서의 사상과는 평행을 이루는 반전 구절이 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절). (66.2)
 누가복음은 이 뒤집힘의 주제가 줄줄이 엮여 있다. 야고보처럼, 누가도 B.C. 8세기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관심, 압제하는 부자들을 향해 저주를 전했던 아모스, 미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발자취를 따른다(암 2:6-8; 4:1-3; 5:11-13; 미 6:6-16; 사 1:10-26). 누가복음에는 부한 자들이 궁극적인 심판 앞에 굴복하는—예를 들어, 어리석은 부자(눅 12:13-21)와 부자와 나사로(16:19-31)—예수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담겨져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에게 나눠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음이 명백한 사건들, 예를 들어 부자 관원(18:18-30)과 삭개오(19:1-10) 이야기도 포함시켰다. (67.1)
 야고보, 예수님, 누가는 분명히 오늘날의 사회 안에서 문제들을 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 시대의 가치체계로부터 되돌아 온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Jacques Ellul은 돈과 권세(Money and Power)라는 책에서 우리의 현재 경제 구조 안에서 돈은 가치의 규준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증명한다. 그때 부자들은 모방할 대상들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돈을 가진 자들은 찬양받고 격찬받는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동정받고 모욕받는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보여지며, 부자들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로 여겨진다. (67.2)
 나는 우리 20세기 세상과 1세기 팔레스타인의 압제받는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평행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겠지만, 평행적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야고보서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하다면, 우리도 압제받는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동시에 그들의 비천한 상황을 함께 나누기를 거절하는 압제적인 부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음에 틀림없다. (67.3)
 ■ 말씀을 적용함
 1. 내가 주위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부유한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나는 야고보서의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그것들이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의 기별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68.1)
 2. 당신의 교회 목사가 “모든 부자가 잃어버림을 당하거나 ‘쇠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균형을 잃어버린 채 9-11절을 설교한다면 어떠할까? 당신의 느낌은 어떠할 것인가? 당신은 야고보가 이 같은 “균형잡힌” 진술을 주었다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당신의 대답을 설명하라. (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