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9-11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그때로부터 줄곧 성경의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가치체계에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야고보 당시 사회의 부유한 청자나 독자가 그 서신에서 풍자적으로 권고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반응이 저자의 권면에 대하여 경시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가히 있음직한 일이다. (59.1)
 이 서신이 더욱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2, 3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시간이었다. 1:9-11의 구절들과 같은 부분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기 시작한 부유한 사람들을 증가시키는 거침돌로 제시되어진다. 이로 인해, 야고보서는 쓰여진 지 거의 300년 후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가장 마지막 책 중의 하나였다. (59.2)
 최근 수세기 동안, 기독교 국가가 우세하게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로 통치되면서, 야고보서의 이런 구절들은 설교나 성경연구의 적절한 주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대망(大望)—미국인, 자메이카인, 브라질인, 아이티인의 꿈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 부유해 질 것이며, 반면에 가난은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그분의 저주의 표징이라는 신학적 가설에도 상반된다. (59.3)
 우리가 본문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이해와 오해들을 뒤로 제쳐두고, 엄격하게 야고보의 문맥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이상을 일시적으로 묻어놓고, 그것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선하게 들을 수 있을까? (59.4)
 ■ 말씀에 들어감
 9-11절을 두세 번 읽으라. 그것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받아들이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고 나서 아래의 지시에 따르라. (60.1)
 1. 1:9-11; 2:1-8; 4:13-16; 5:1-6을 주의 깊게 읽으라. 당신의 노트에 가난한 자의 특징을 열거하라. 그리고 부유한 자의 특징도 열거하라. 당신은 경제적이 아닌 영적으로 그것들의 사상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어떤 구절을 발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을 진술하라. 왜 당신이 그 구절들을 영적으로 해석했는지를 설명하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구절들이 경제적인 부분으로만 해석되어져야만 하는지 설명하라. (60.2)
 2. 1:9-11을 읽으라. 그러고 나서 2-8절을 읽으라. 9-11절이 앞의 절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을 당신의 노트에 기록하라. (60.3)
 3. 9-11절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와 비교하라. 당신이 발견한 모든 유사점들을 기록하라. 누가복음에서 이 구절들과 병행하는 다른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기록하라. (60.4)
 ■ 말씀을 탐구함
 가난하지만 부함
 앞장에서 나는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모든 시험에 직면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도록 권고했음을 보여 주려했다(1:2). 9-11절에서 우리는 야고보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강력한 시련들 중 첫 번째 예를 발견한다. (61.1)
 비천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9절), 가난한 사람은 아마도 가장 비참한 시련을 만난 사람이다. 왜 야고보는 이것을 그의 첫 번째 예증으로 삼았을까? 왜 야고보는 그의 적은 문서에서 다른 것보다 이 문제를 더 강력하게 다루었을까? (61.2)
 여기서 야고보는 그의 사회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자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기를 바란다. 야고보는 비천한 상황 속에서 여러 종류의 시험을 당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인내하기를(3절)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높음”(9절)을 자랑하는 그들의 의기양양함을 확고히 해야함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한 소망의 긍정적 말씀들이다. (61.3)
 우리가 방금 제안한 것처럼, 9절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2절의 시험을 만난 사람들 중 한 명이라면, 우리는 이 서신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단 사이의 평행구절을 보고있는 것이다. 즉, 9-11절2-9절에서 주어진 서론적 개관에 대한 예증으로서 병행적 위치에 있음을 나는 제안한다. 이것은 8절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10, 11절의 부한 사람과 병행시킨다면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보이는 징표 중 하나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시도임을 우리가 인식할 때(이 주석서 전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더욱 가능해진다(마 6:24을 보라). 이것이 야고보가 가진 생각이라면, 가난하고, “낮은” 사람은(1:9) 2, 3절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일 뿐 아니라, 부하고 교만한 사람은(10, 11절) 6-8절의 두 마음을 품어 요동하는 자일 것이다. (61.4)
 9절“낮은”이라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낮은, 얕은, 비열한, 중요치 않은, 나약한, 가난한”이란 뜻이다. 이는 압제받고 고통받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2에서처럼, 부함에 대조되는 경제적 가난함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사회적 계층에서 낮은 위치에 있으며 힘도 없다. “가난함”에 대한 많은 성경적 단어들이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상태, 즉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난과 압제라는 외부적 상태뿐 아니라 사람의 품성과 관련하여서는 내부에 존재하는 영적인 상태도 있다. (62.1)
 많은 자들이 야고보의 기별에서 이 부분을 떼 내어서 영적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들은 비천한 곳에 처한 자나 혹은 가난한 자를 마태복음 5:3“심령이 가난한 자”로 간주한다. 이런 “가난함”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구약의 몇 관련 구절과 특히 중간사 시대의 작품에서 이 가난이라는 용어가 은유적이고 영적으로 이해된 곳이 있다(예를 들어, 시 86:1; 디벨리우스, 39-45). 이런 경우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경건한 자요,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이다. 이런 구절들에서는 “가난”한 자가 경제적으로 부한지 가난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없다. 아마도 야고보 시대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물질적 소유함은 부족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는 헌신하고 경건한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 서신을 주의 깊고 상세하게 읽어 보면 야고보가 가난에 대한 영적이고 내적인 면을 강조하였다기보다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상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2:6; 5:1-5). (62.2)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권장한다(1:9). 이 구절은 “그들의 의기양양함을 과시하라”로 번역될 수 있다. 자랑하고 과시하며 영광스럽게 여기라는 명령은 시험을 만났을 때 기뻐하라는 2절의 권면과 유사하다. 이 문맥에 나타난 자랑하는 사람은 거만하게 자신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다. 반대로 이들은 부분적으로 Douglas Moo가 “기쁨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가치를 두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다”(67)라고 쓴 것과 같은 것이다. (62.3)
 우리 대부분은 부함이 사라질 때보다 다가올 때, 부함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기뻐하기가 더 쉬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성공하지 않으면 불평한다. 야고보는 가난함의 어려움을 인식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시험이요, 그 사회에서의 고통의 근원임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난한 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그들은 가난한 것 같지만 부한 자이다. 그들은 높은 지위를 소유한다. 그들의 부함과 높은 지위는 경제적 소유와 사회적 지위의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한 그들의 지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그분의 특별한 소유이다(2:5). 그들은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기다리는 동안, 현재의 하나님의 통치하심 안에서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한다(5절; 눅 1:52, 53; 6:20과 비교하라). 그들은 하늘의 유업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상받는 소유자가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실제적 높임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들은 기뻐할 수 있다. (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