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Ⅰ 부 사무엘: 왕도 없고 여호와의 말씀도 희귀함 (삼상 1-7) 제 2 장 법궤: 무가치한 매력, 거룩한 공포 (삼상 4-7)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슬쩍 웃어넘길 일이다. 첫째로, 블레셋 사람들은 신이 하나인지 많은지를 몰랐다. (우습게도 이스라엘 사람 중 많은 이들 역시 이것을 확실히 몰랐다!) 둘째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여리고와 싸울 때, 언약궤가 전쟁으로 인도하였었다(수 6). 그러나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한 번도 없었다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실수로 이스라엘의 “신들”이 광야에서 애굽인들을 쳤다고 말하였다. 넷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지게 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주인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애굽의 종살이에 관한 불편한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65.2)
 그러나 블레셋의 이야기 속의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이 “신”은 참으로 독특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만은 근본적으로 정확한 것이다. 신이 노예가 된 백성과 고락을 같이하며 그들을 인도하고, 새 땅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것은 이 신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일한 신이며, 자연의 과정 속에 내재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연의 창조주와 주인이지,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65.3)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할 만큼 역사를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이 여태껏 들었던 신과는 달랐고, 언약궤는 그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두려워 떨었고, 그럴 이유가 충분하였다. (65.4)
 그런데 그들은 왜 항복하고 뒤로 돌아서 도망가지 않았는가? 기껏해야 사람에 불과한 존재들이 신들(gods)과, 특히 이 신(God)에게 대항하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런 대항을 이 인간에 불과한 블레셋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들을 이기려고 하였고, 이겼던 것이다.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사천이 상했는데 이번에는 삼만이 엎어졌고, 나머지는 자기 진영으로 도망하였다(4:10). 순간에 기고만장했던 이스라엘은 패배하였고, 겁먹은 블레셋이 승전, 그것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65.5)
 블레셋의 승리가 얼마나 컸는가? 사무엘상의 이 부분에서 세 구절이 구약의 납득하기 어렵게 큰 숫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극단적인” 예가 6:19인데, 표준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70인역」은 하나님께서 50,070의 벳세메스 사람을 치셨다고 말한다. 「새국제역」과 「새개정표준역」은 소수의 히브리 사본을 따라 70이라 말한다. 그러나 4:2, 10에서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를 취급하고 있는데, 사본 이문이 없어서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4:2에 의하면, 첫 전투에서 블레셋인들이 이스라엘인 4,000명을 쳤다고 하였고, 4:10에 보면 그들이 둘째 전투에서 삼만을 죽였다고 한다. (66.1)
 이 숫자들이 너무 큰가? 어떤 이들은 성경에 나온 그 숫자대로 받아들이기를 좋아한다. 어떤 다른 이들은 과장법이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히브리어 알레프(ʼaleph, 천[1,000])가 여러 개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히브리 단어는 “두목” 혹은 “지파”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제임스왕역」과 「새국제역」의 미 5:2마 2:6을 비교). 만일 히브리어 알레프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면, 블레셋 사람들은 첫 전투에서 두목 네 명을 죽였고, 둘째 전투에서 두목 삼십 명을 죽인 것이다. 아니면 첫 전투에서는 부대 네 개를, 둘째 전투에서는 부대 삼십 개를 멸한 것이다. (66.2)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든지 블레셋인의 둘째 승리는 첫 승리에 비하면 너무 크다. 그것이 1,000명이든지, 두목이든지, 부대든지 혹은 단지 과장이든지 간에 그 비율은 4 대 30이다. 그 이야기의 중심은 블레셋인들의 확실한 승리이다. 알레프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66.3)
 블레셋의 그 엄청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상의 저자는 블레셋 진영에 있었던 어떤 환희도 기록하지 않는다. 단지 이스라엘의 화에 대하여 끔찍한 보고를 할 뿐이다—참패, 이스라엘 군대의 와해, 삼만 군사의 살륙, 언약궤가 빼앗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4:10, 11). (67.1)
 베냐민 사람이 전장의 소식을 가지고 실로에 도착하였을 때, 98세의 대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이 죽은 소식을 견딜 수는 있었으나,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 놀라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자가 태어났는데, 그 어머니는 “영광이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주었다(21절). (67.2)
 예루살렘의 멸망이 눈에 선한 독자들은 그와 같은 상황을 다시 알아보게 된다: 대제사장이 죽고, 그의 아들들도 죽었다. 새로 태어난 아들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해산 중에 어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20절).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22절)는 것이었다. (67.3)
 블레셋인에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옴(5:1-6:21)
 승자들은 이스라엘의 “참패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당에 들여놓았다. 참패한 신을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블레셋인들은 유일신론자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당시에는 명실공히 유일신론자들이 아니었다(7:3을 보라). 하여튼 블레셋 사람들은 곧 여호와가 참패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불려 왔을 때, 비록 잠을 잤다 할지라도 블레셋이 그의 거룩한 상자를 빼앗았을 때에 갑자기 살아난 것이다. 다곤은 두 번이나 언약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어져 있었고, 둘째 경우에는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5:3, 4). 공포에 질린 이들은 포이즌 볼(독이 든 공을 서로 남에게 넘겨주는 놀이)을 하며 언약궤를 아스돗, 가드, 에그론으로 돌리고, 각 도시는 여호와의 무서운 손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67.4)
 마침내 에그론은 국민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간청하였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5:11). 블레셋 땅에서 7개월간의 공포 정치를 마치고 언약궤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벳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기쁨으로 그 궤를 맞이한다(6:14, 18)—그 기쁨도 잠깐이었으니, 그들 중에 70명(6:19; 「70인역」과 대부분의 히브리어 필사본에는 50,070명)이 궤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에(히브리어 성경, 「새국제역」)—또는 「70인역」에 의하면, 궤가 돌아올 때에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새개정표준역」)—죽음을 당했다. 또 다시 공포가 다스렸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불러 궤를 그들의 손에서 가져가라고 하였다. (68.1)
 법궤가 이스라엘로부터 블레셋으로 이동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인들이 궤를 마술 상자로 생각한 사실을 드러낸다. 고대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궤 속의 돌판에 새겨진 그 도덕적 차원은 그 궤의 “마술성”을 선호함으로 너무 쉽게 경시되고 말았다. 언약을 거역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는 사무엘상∙하에 소상히 열거되었다-절도(12-15절), 성적 부도덕(22절), 부모를 욕되게 함(25절). 그러나 바로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언약궤를 진중으로 가져간 사람들이다. (68.2)
 언약의 중심에 있는 도덕적 핵은,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사용하시는 방법은, 해를 끼치든지 도움을 주든지 간에,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웃사가 선의로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궤를 붙든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삼하 6:6, 7). 대조적으로 홉니와 비느하스는 오만가지 죄를 다 짓고도 궤를 위험부담 없이 다루었다. 물론 그들의 날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궤에 의해서가 아니라 블레셋 사람에 의해 죽었다. 간단히 말하여,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에 불과하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궤를 만진다고 해서 무사할지 죽임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68.3)
 블레셋 사람들은 거룩한 것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마술적 개념이 깊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궤가 더 마술적으로 보이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악하게 되어 궤가 함께 있어도 아무 감각이 없었던 것 같다. 7개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은 오로지 그것으로부터 공포만 느꼈다. 웃사나 벳세메스 사람들을 쳤던 공포와는 조금 성질이 달랐겠지만,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어느 블레셋 사람이 궤를 함부로 만지거나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치신 예가 없다. 궤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때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69.1)
 보충 설명: 여호와와 신들(엘로힘, ʼElohim)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요한계시록 12:7-9는 선악 사이의 투쟁과 양편에 진친 존재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용과 그의 사자들”과 더불어 싸우며, 용은 분명히 “사단”으로 나타냈다(9절). 그러나 구약에서는 사단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더 특별한 것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도열해 있는데, 그들은 “신들”(엘로힘[ʼElohim])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비롯하여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나타낼 때에 사용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69.2)
 법궤가 블레셋을 방문한 성경의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이방 민족들과 그들의 신들(엘로힘)을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떤 점에서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취급하시는 방법과 이스라엘을 취급하시는 방법은 비슷하다. 한동안 그분은 이스라엘에서보다 블레셋에서 더 활동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와 그의 거룩한 궤를 존중히 취급하였다. 그들은 그 궤를 그들의 “신”(엘로힘) 다곤의 전에 모셨다(5:1-5). 그들은 그들의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다고 했다(7절). 아마도 그들은 그에게 기도하였다(“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12절). 그리고 그들은 합당한 속건제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신중을 기했다(6:4, 5). (69.3)
 여호와 편에서는, 비록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위에 엄하게 임하였어도, 또 그들이 다곤을 경배하였어도 여호와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여호와는 그들의 속건제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가 그들의 기도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취급하시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한 가지는 그분이 블레셋인들에게 그의 언약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 다른 누구와도 맺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릴 때까지 그들에게 쉼을 주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자기 백성에게 하셨던 것보다 그들에게 더 꾸준히 임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한동안 여러 해 궤 없이 방황할 수 있었고 궤는 고요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블레셋인들 중에서 그 압박은 거세어서 그들이 궤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