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9 장  안식일, 숨과 평강과 용서의 나눔의 날
 안식일을 기다리는 마음
 안식일을 기다리는 내 마음을 시편 기자가 앞서 노래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로 소성케 하소서”(시 119:25). (87.1)
 나에게 이 시는 안식일의 시이다. 여섯 날들의 먼지 속에 마른 흙덩이가 된 사람이 애타게 단비를 기다리듯 안식일을 기다리는 시이다. 이 시를 읽을 때 나는 창세기 2장 7절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공동번역)라는 말씀이다. 시편 119편“내 영혼”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사람 모양의 흙덩이다. 숨이 없는 흙덩어리 사람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하신 그 흙덩이다. 곧 “진토에 내려간 자”(시 22:9), 시체와 같은 된 사람이 시편 119편 2절“진토에 붙은 내 영혼이다”. (87.2)
 이 영혼이 육일 동안 부르짖고 있다. 안식일에도 부르짖고 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공동번역에는 “말씀하신 대로 이 몸을 살려주소서”라 했다. 영어성경에는 “renew my life, revive me”등으로 옮기고 있다. “내 생명을 새롭게 해주소서 또는 내 생명을 살려주소서”이다. 그런데 나는 이 구절을 “주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라고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로 읽는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의 말 그대로 “하나님의 감동”“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이다(딤후 3:16, 데오프뉴스토스, Θεόπνευστος). (87.3)
 하나님의 콧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숨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시편 119편 25절창세기 2장 7절은 같은 주제이다. 창세기 2장7절에서는 객체로 나타나 있는 사람이 시편 119편 25절에서는 주체가 되어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이시여 “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소서,” “마른 흙덩이 같은 내가 살아 숨쉬는 산 사람이 되게 하소서.” (88.1)
 안식일은 “진토에 내려간 자”(시 22:9), “흙으로 돌아간 자”(창 3:19), 숨이 끊어진 자, 시체가 된 자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기로, 하나님의 생기 같은 말씀으로 다시 소생하는 날이다. 마른 흙덩이의 숨, 마른기침 같고, 천식과 탄식 같은 숨, 곧 시체의 숨 같은 목숨을 하늘 평안의 새 숨, 새 생명의 숨으로 갈아 쉬는 날이다. 숨 넘어간 자가 숨돌리는 날이다. 진실로 제칠일 안식일은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 돌리는” 날이다(출 21:12). 그리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에네푸세센, ἐνεφύσησεν, 창 2:7)이 곧 여종의 자식의 숨돌림(아나푸쉬케, ἄναψυχη, 출 23:12)이다. 이 두 곳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똑같이 “숨쉬다”라는 네페쉬의 파생어이다. 따라서 여종의 자식이 숨돌리는 안식일은 하나님이 흙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창세기 사건의 재현이다. 안식일은 우리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의 날이다. 우리에게 창세기 2장 7절의 사건이 재현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88.2)
 재창조는 창조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재창조는 더 나은 창조이다. 창조는 흙 사람이 산 사람 곧 생령이 되는 창조이다. 재창조는 죄인이 성령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창조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을 생기로서 경험하는 차원이 창조라 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을 성령으로 경험하는 차원이 재창조이다. 이 재창조의 사건을 말해주는 성경절이 요한복음 20장 22절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다. (88.3)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는 여종의 숨돌림(아나푸쉬케)으로 나타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복으로써의 재창조이다. 그러나 똑같은 창세기 2장 7절의 사건이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예수님의 숨을 내쉼(에네푸세센)과 우리의 “성령받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창세기적 현상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더 나은 창조, 즉 산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높아지는 재창조이다. 신약의 안식일에 기대되는 바 믿는 자의 경험이 이런 것이다. (89.1)
 또한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은 하나님의 “가라사대”이고, 예수님의 “숨을 내쉼”이 예수님의 “가라사대”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숨불어 넣으심”이 모든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숨 불어넣으심을 체험한다. 안식일은 우리들의 성령 경험의 날이다. 특별한 날이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흙 사람이 생령이 되었고(Gk: 푸스켄 조산; Hb: 네페쉬 하야)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제자들이 성령(프뉴마 하기온)의 사람이 되었다. 안식일에 우리가 경험하고자 하는 재창조는 성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사람이 되는 경험이다. 이 경험을 시편 119편 25절의 시인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안식일과 함께 갱생의 삶을 기다리고 있다. (89.2)
 안식일: 하나님이 당신의 숨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는 날
 안식일의 하나님은 마른 흙인 우리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고 성령을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이다. 창 2:7에서 그랬듯이 안식일의 하나님은 진토로 내려간 우리에게 오시고 죽음이 된 우리에게 오신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시듯,” 마리아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으시듯”(눅 1:35) 하나님이 마른 흙 같고, 시체 같은 사람을 “덮으신다.” 마른 흙덩이 사람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사람의 입에 자기 눈을 사람의 눈에 자기의 손을 사람의 손에 대고”(왕하 4:34),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다(창 2:7). “들어가서 문을 닫아 하나님과 나 둘뿐인”(왕하 4:33) 나의 영혼의 “골방”(마 6:6)에서 그렇게 하신다. “내가 들어가 문을 닫은 골방,”“은밀한 중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께서”(마 6:6) 그리하신다. 차디찬 시체로 누워있는 나의 “몸이 차차 따듯해지기까지”(왕하 4:34) 거듭하여 그리하신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다시 사람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릴”(왕하 4:35)것이다. 창조 때 흙 사람 위에 오르고, 재창조 때 흙 사람 위에 다시 올랐듯이 이 안식일에도 거듭하여 마른 흙덩이 같은 사람의 위에 올라 엎드릴 것이다.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뜰 때까지”(왕하 4:5) 다시 올라 엎드릴 것이다. 엎드려 숨을 불어넣고 온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사랑을 불어넣고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이신 저 실로암이 죽어 흙이 된 사람을 품고 씻어 “다시 눈을 뜨게 할 것이다”(요 9:7, 11, 14). (89.3)
 안식일은 죽어 흙이 된 사람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아나서 “눈이 뜨는 날”이다(요 9:14). 안식일은 하나님이 흙이 된 사람에게로 와서 죽음이 된 사람을 덮고 안는 날이다. 하나님이 흙 사람을 안아 흙투성이가 되고, 피투성이의 사람을 안아 피투성이가 되고, 죽음 투성이의 사람을 안아 죽음 투성이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일로 흙투성이가 되었고, 십자가의 재창조로 피투성이가 되고, 무덤에서 사람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죽음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지 못하고 일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쉬지 못하고 일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흙투성이로 일하고, 피투성이로 일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일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다시 삶을 위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우리를 붙들어 안고 불어넣은 그 숨으로 진토에 붙여진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날이다. (90.1)
 안식일: 평강을 위해 용서를 위해 아버지께서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듯 예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하셨다.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기 직전에 그렇게 하셨다. (91.1)
 안식일은 봉사의 주체들을 확장시키는 신앙의 원리이다. 안식일의 삶에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숨 불어넣고, 숨 갈아주는 주체로 나선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숨의 공급자로 보내신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들의 맏형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인 “너희를” 보내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셨다. 안식일의 신앙은 우리들을 언제까지나 숨의 객체와 숨의 수요자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숨의 주체의 자리로, 숨을 나누어주는 자리로 평강을 나누어주는 자리로 보내신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리로 우리를 보내신다. 우리를 변화시킨다. (91.2)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웃들에게 숨과 평강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웃들을 숨돌리게 해야 한다. 안식일의 자녀들은 숨이 꺼지고 있는 이웃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어야 한다. 평강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하시고 아들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의 사람 아들인 우리들도 맏형님 예수를 따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라고 해야 한다. (91.3)
 이 “평강”“예수께서 우리에게 끼치신 평안”이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안”, 곧 예수의 “나의 평안”이다(요 14:27). 창세기 31장 17절에서 나 여호와가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다”하셨던 그 평안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기원했던 평강(εἰρήνη, 에이레네)은 하나님이 제칠일에 경험하신 안식일 안식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어 평안하셨다는 그 평안은 히브리어로 “인나파스”(yinnapas)이다. 네페쉬(숨쉬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글성경 출애굽기 21장 22절에서 “숨돌리다”로 옮긴 낱말도 “인나파스”이다. (92.1)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1절“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14장 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너희에게 숨이 있을지어다” 또는 “숨돌림이 있을지어다”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 2절14장 27절을 합하여 고쳐 옮겨본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하늘의 숨을 끼치노라 너희에게 숨 돌림이 있을지어다 이 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이 하늘 숨을 끼치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가 될 것이다. (92.2)
 그렇다. 안식일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께서 숨돌림의 역군으로 세상에 보내신 사자들이다. 하늘의 천사들이다. 수넴 여인의 숨넘어간 아들에게로,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로, 그들의 시체가 누인 닫친 골방으로 보내진 자들이다. 삶의 가망성으로부터 완전히 문 닫쳐진(마 6:6) 고통과 낙담의 깊은 자리로 보내진 자들이다. (92.3)
 가서 죽은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아이의 살이 차차 따듯해지며 드디어 눈을 뜨기까지 숨을 불어넣고 체온을 불어넣도록 보내진 자들이다(왕하 4:33, 34).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하도록 보내지 자들이다. (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