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2 장 아담, 노아,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우리니 [heqîm] 너는 네 아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창 6:18)라고 하시면서 “언약”(berît)이란 단어를 노아에게 말씀 하셨다. 히브리 단어 헤킴[heqîm]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미 맹세하신 서약을 “유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에 인간과 언약을 하셨음을 의미한다. (25.1)
 그러므로 웬(Gordon J. Wenham)은 이 구절을 “나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언약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4 하젤(Gerhard F. Hasel)은 “이러한 개념에서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아담과 맺은 언약의 갱신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창세기 3:15에서 그것을 암시적으로 지시한다.”5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을 보존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25.2)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가족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히브리서 11장“믿음으로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7절)다고 한다. 성경은 “야훼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다른 이들을 향해 중재적 입장에 서고자 택함을 입었다. (25.3)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노아의 순종은 그의 모든 가족을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였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야훼께 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를 드렸다”(창 8:20). 노아는 동물 희생으로 제사장적 중보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이 감사 예배의 순간이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창 8:21)라는 새로운 약속을 하신 순간이었다. (26.1)
 그 때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거룩한 율법 아래 두셨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 후에 짐승의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고 교훈하셨다(창 9:4).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라고 명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노아는 모든 살인자를 공의 앞으로 데려와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의 악이 억제될 수 있었다(창 9:5). (26.2)
 그러나 이러한 법적 요구의 이유는 더욱 깊은 곳에 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여기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언급된 바와 같이(창 1:26-27) 짐승보다 뛰어난 인간의 특별 한 신분이 다시 한 번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자에 대한 사형 판결을 정당화한다. 이 사법적 책임은 로마서 13:4에 따르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칼을 가진 시민 권위에서도 계속된다. (26.3)
 혹자는 오늘날 우리 모두는 여전히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간의 선천적인 악을 억제해야 하는 노아 언약의 율법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채색의 무지개 표징으로 표현되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우주적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표징”은 근본적으로 창조주 그 자신을 위한 표징이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 9:16-17). (26.4)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명을 죽이지도 않으시고 땅을 멸하지도 않으실 것이다(창 8:21; 9:11). 일정한 계절의 순환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창 8:22).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땅을 보존하시려 스스로 헌신하시는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그들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다. 언젠가 우주는 창세기 3:15에 기록된 은혜 언약의 첫 계시에 약속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궁극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7.1)
 노아 언약의 지정된 표징은 다채로운 무지개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구름의 심판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이 언약의 표징은 심지어 하나님의 오늘날 언약의 백성들에게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상기시켜 준다. (27.2)
 아이히로트(Walter Eichrodt)는 무지개를 “이방인을 향한 야훼의 영원한 은혜”6라고 적절하게 불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창조주의 공통 은혜를 나타낸다. “영원한 무지개” 표징은 요한이 하늘 이상에서 본 것처럼(계 4:3 참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상징이다. 그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에게 구원하실 수 있으면서 모두를 심판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27.3)
 성경은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 7:23)고 말한다. 신약은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고 경고하면서 홍수를 마지막 때의 멸망에 대한 예언적 표상으로 해석한다. 이로 인해 노아의 믿음은 마지막 때의 신실한 신자들을 위한 표상이 된다. 창세기 본문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창 6:9)다고 한다. (27.4)
 웬햄(Gordon J. Wenham)은 노아를 주석하면서 “그는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의 율법의 충성스러운 지킴이였다”7고 하였다. 웬햄은 노아의 “의”에 대해 그가 하나님의 조건들에 대해 충성스럽게 순종하였다는 점을 지목하여 강조하고 있다(창 6:9, 22; 7:5, 16). 비둘기를 다시 보내기 전에 노아가 “칠일을 더” 기다렸다는 것에 대해 “사실, 새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칠일주기를 통해 노아가 안식일을 지켰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8고 한 그의 주석은 홍미롭다. (28.1)
 예수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인자의 올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며 그분과 동행할 사람들을 다시 기대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대로 그 시대의 우상 숭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계 14:12) 최후의 남은 백성을 구성할 에녹들과 노아들이 있을 것이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과 구속적 언약 관계속에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궁극적인 헌신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 14:4) 것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의 구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의인들에게 마지막 날 ∙∙∙ 그들도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보증”9이 된다. (28.2)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주 야훼는 셈과 노아의 계열(창 11:10-31)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새로운 결정을 하셨다. 북 메소포타미아인 하란에 살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땅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부름을 받았다. 주께서는 그의 “씨”(창 12:1-3; 22:18)를 통하여 그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복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축복에 대한 이 거룩한 발의는 창세기 3-11장에서 인간이 삼중 저주 아래 놓여진 이후(3:17; 4:11; 6:17)에 놀랍게 다가 온다. 분명히 주께서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의 영원한 사랑안에서 창조주는 여전히 그의 피조물들에게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29.1)
 하나님은 다시 한 사람을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택하셨다. 사실, 우리가 창세기 12장, 15장 그리고 17장에서 읽어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은 이 언약을 24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맺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낸”(창 15:7) 야훼로 소개하셨다. “야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이다(창 2:4; 4:26). 이 야훼께서 그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에 모두 능하시다는 의미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고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나타내셨다.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메시아적 약속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네 가지 약속을 하셨다. (29.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야훼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 12:2-3, 7).
(29.3)
 창조주께서는 아브라함과 그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선포하신 “복”으로서 그의 구속의 목적을 갱신하셨다. 그는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셨고”(창 1:28; 5:2),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9:1).” 하나님은 인간을 속량하고 악을 멸하고 낙원을 회복하실 구주에 대한 이전의 약속을 이러한 방식으로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그의 약속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약하셨다. (29.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13:16; 15:18; 17:8에 반복)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가나안 “땅”을 위한 약속과 연결시키셨다. 이 약속은 회복될 낙원에 대한 상징적 서약과 예언적 표상의 기능을 한다. 예수와 바울은 모두 원형적 성취에 있어서는 이 약속의 지리적 한계를 제거하고 그 “땅”을 확대하여 전 세계를 포함시켰다(마 5:5; 롬 4:13 참조). 맥코미스키(T. McComisky)는 “마치 아브라함의 첫 후손들이 땅의 약속을 받은 것처럼, 그의 미래의 후손들은 언젠가 평화의 왕이 정복한 세상을 아브라함의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10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30.1)
 어떤 역자들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구절을 “스스로 축복하리라”로 번역한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에서 메시아적 축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아브라 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메시아적 약속을 이해하였다 바울(갈 3:816절에서)과 베드로(행 3:25-26에서)는 창세기 12:7; 22:1828:14에 나오는 “씨” 혹은 “자손”이란 단어를 부활한 메시아 한 분에게 적 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 곧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9)에 포함시켰다.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