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2 장 아담, 노아,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천지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그의 말을 불신하고 그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을 때, 그의 세계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이미 그의 창조 계획 속에 이 비상사태를 맞을 준비를 하셨다(엡 1:4; 벧전 1:20 비교), 하나님은 죄의 존재를 정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모든 지적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 자신과 그의 진정한 품성에 대해 좀 더 배울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20.1)
 에스겔 선지자는 우주에서의 죄의 기원은 인간과 시작되지 않았다고 나타내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로 왕의 자기 높임을 천사와 같은 존재와 관련하여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2-15, 17). 그러므로 인간은 속임수의 희생이 되었다. 창조주는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들, 곧 그 사는 날이 너무나 제한되어 짧은 삶을 경험하게 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나타내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인류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의 동정은 지상에 죄가 나타나자마자 곧 바로 표현되었다. (20.2)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낙원에서 불순종한 동반자를 찾아 은혜의 구원을 제공하려는 하나님의 결단은 창조주가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질서를 어긴 범죄자들을 향해 말을 거시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 시작하셨다. 그는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진정한 원수는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나 반역자(히브리어 사단)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참소자”로 돌아선 이전의 천사장이라는 것을 아셨다. (21.1)
 이 힘 있는 천사가 뱀을 아담과 하와를 속이는 그의 도구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그를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세상을 꾀는 자”(계 12:9)라고 묘사한다. 사단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주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 자신의 대항 정부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타락도 구속도 단지 인간의 관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구속은 인간을 위해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옹호하기 위해서도 시작되었다. (21.2)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지만 범죄한 부부에게는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21.3)
 로벗슨(O. Palmer Robertson)은 창세기 3:14-19에 나타난 심판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주적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인간 구속의 역사는 인간과 창조된 모든 환경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동물 세계도 죄에 빠진 인간의 타락의 결과를 느끼게 되었다.”1 창조주의 이름은 사단이 여자에게 한 거짓말로 더럽힘을 받았다. 그는 여자에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창 3:4-5). (22.1)
 창조주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과 영원한 목적을 옹호하기 위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으시다. 구속의 계획의 중심에는 창세기 3:14-19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약속이 서 있다. 여자를 통하여 창조주는 거짓의 왕을 멸하고 인류를 낙원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구속주를 보내주실 것이다. 이것이 아담과 인류와 맺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다. 그것은 “창조의 언약과 구속의 언약을 구조상 나누일 수 없도록 묶어주는”2 역할을 한다. (22.2)
 인류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주도권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죄인을 정죄하는 공의보다 승하신 자비롭고 돌보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과의 친교 회복의 주제는 신구약을 통일시킨다. 그것은 또한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창조주의 신실하심에 대한 성경 기별의 놀라운 통일성을 제공한다. 요츠(Jacob Jocz)는 이 거룩한 약속의 일관성을 인식하였다. “언약은 신구약 모두를 포괄하며, 넓고 다양한 견해들의 내적 통일성을 만드는 원칙을 제공한다.”3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로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22.3)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목적하신 그분의 뜻과 선하신 기쁨의 계획 안에서 구속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그의 창조 사역 전에 세워졌음을 밝혀준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마 25:34; 딤후 1:9 비교) (23.1)
 복음은 인간의 창조는 그 기원과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창조 주간의 첫 날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첫 행동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이는 참 빛”(요 1:9; 고후 4:6과 비교)이신 그의 지시자요 예시이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5-18 참조). (23.2)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시작이며 목표라는 이러한 사도적 창조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계획을 세우셨을 때 그의 구속 계획도 함께 생각하셨음을 드러낸다. 창조 사역과 구속의 언약은 깨질 수 없는 신학적 통일체로 제시되었다. (23.3)
 우선하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
 타락 이후의 창세기 3장에서나 아벨의 살인 이후의 창세기 4장에서 보듯이 창조주께서 죄악된 세상에 저주를 선포하실 때마다 그는 죄인들을 궁극적인 멸망에서 보호하시고 그가 택한 이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발한 저주를 넘어서신다. 그와 같은 방식은 죄 있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 의지를 보여 준다. 성경은 인간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행위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문서이다. (23.4)
 성경의 원대한 목적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아 그의 존재와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리고 그가 낙원을 회복하기 위해 세우신 계획을 인해 그를 사랑하고 그를 경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것으로 인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품성에 대한 오해로부터 회복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미 6:8) 이라는 동사로 표현된 구속적 언약의 관계로 귀착된다. (23.5)
 이러한 이상이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창 5:22, 24)였던 에녹에게서 경험되었다. 에녹의 의로운 삶과 확고한 고결성은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이다. 반면에 세상의 도덕적 어두움은 인간의 악한 성향을 따라간 결과이다(창 6:5).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암 3:3)겠느냐고 한 아모스의 외침과 같이 언약 관계에 신실함을 의미한다. (24.1)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
 우리는 노아의 기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땅은 아담의 범죄와 가인이 행한 살인으로 인해 이중의 저주 아래 있었다. 품성의 표준을 타락한 인간의 표준으로 떨어뜨리는 인간의 본성적 열정으로 “신들”이 만들어지면서 결국 거짓 예배가 존재하게 되었다. (24.2)
 라멕에 의하여 일부다처와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창 4:19-24). 마침내 죄된 행위는 패과와 강포가 우주적 스케일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심판을 선포하셨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 6:7). 분명히 하나님은 그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이 너무나 그와 같지 않게 된 것을 보았을 때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창 6:6)하셨다. (24.3)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대상으로서 노아를 택하는 자비를 보여주셨다. “그러나 노아는 야훼께 은혜[hên]를 입었더라”(창 6:8). 히브리어 (hên)은 은혜를 나타낸다. 이것은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를 찾았고, 노아는 스스로 은혜가 필요함을 알았다. 노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이었다. 에녹처럼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하나님과 함께 변화된 교제를 나누기를 향유하였음을 의미한다(창 6:5).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