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9. 영원의 순간 (Gerald winslow)
 과거에 대한 기억은 시간의 흐름의 실체를 믿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에드문드 후셀(Edmund Husserl)은 훌륭한 예증을 이용하여 지각의 흐름이라는 “내재적인 시간”을 부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설명했다. 그는 말하기를 “음조의 과정 곧 멜로디의 지각은 심지어 그 멜로디를 들을 때에도 어떤 연속을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에 관한 온갖 의심이나 부인은 무의미하다.”17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을 좀 더 적절히 나타낼 수 있을까? (85.2)
 서구문화에서는 시간의 경과가 일반적으로는 단일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다. 시간은 마치 쏘아보낸 화살처럼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로 달려나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동양에서는 시간을 끝없이 순환하는 고요한 연못 같은 것으로 흔히 상징하지만 서양에서의 시간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파괴하고 종국에는 인생 그 자체까지 파멸시키는 악마이다. 인생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시간은 그렇게 중요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멜로디”는 영원히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시간에 의해 소진되는 생명을 부여받고 영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영원이 시간 안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시간적 존재인 인간들에게 시간의 경험이 남아있다. (85.3)
 달리 방도는 없을까? 표상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다음은 반데르 뤼(Vander Leeuw)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지속은 냉혹하게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이다. 그러나 전능자를 마주쳐야 하는 인간은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인간은 템푸스(Tempus) 곧 구획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축제인 ‘거룩한 시간’을 기념한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주어진 운명을 비키고 가능성을 찾는다”.18 영원의 경험은 모든 시간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되었다. (85.4)
 이같은 시간관은 어린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들의 시간 개념의 발달을 연구해온 장 피아제(Gean Piaget)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원시적”인 시간 개념에서는 “모든 행위가 여전히 그 자체의 시간을 가지며 따라서 행동의 계획들이 여럿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시간의 시리즈가 있다”고 한다.19 예컨데 만약 어린이가 좀 더 빨리 일하거나 일을 좀 더 많이 한다면 시간은 좀 더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 어린이는 다른 어른이나 아이보다 좀 더 생생하게 그 시간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기억들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시간들의 기억인 것이다. (86.1)
 어린이의 “원시적” 시간 개념에 대한 피아체의 설명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간 이해에 대한 게르하르트 폰 라드(Gerhard Van Rad)의 설명과 몇가지 흥미 있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20 확실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힘있는 행위가 다음 다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폰 라드에 따르면 히브리 역대기에서는 단일한 선으로서의 시간이 없으며 시간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관념도 없다. 오히려 시간은 사건들과 결합되어 있다.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다 ∙∙∙ ”21 (86.2)
 모든 시간이 동일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은 확실히 무의미하다. 그러나 심지어 현대인들에게라 할지라도 모든 시간은 동일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일과 기념일과 특별한 휴일들을 기념한다. 미국에서는 계절들이 노동절과 전몰장병 기념일들로 표시되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이라 할지라도 흔히는 시간의 객관화만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즉 시간이 숫자화된 단위로 측정되고 있다는 말이다.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다발과 같은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은 70년으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잴 수 있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날들을 계수하는 교훈은 잘 습득되었다. 물론 시간의 객관적 개념이 미래의 계획 같은 어떤 중요한 과업등을 용이하게 한다.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객관화된 시간, 괘종시계와 구류 처분 선고의 시간은 자주 영원한 “지금”의 기미를 간직한 코앞의 순간을 박탈하기 일쑤다. (86.3)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은 사람을 객관적인 시간의 굴레로 부터 해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대 사회의 소요 가운데서 시간은 냉혹하게 삶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안식일에 시간은 “조용히 멈추어 선다”. 이것이 안식일의 핵심적인 정신이다. 정지 속에서 영원을 만난다. 시간은 더이상 돌이나 기념비가 아니다. 시간은 가능성이 되었다. 헤셀이 말했듯이 “내세의 핵심은 영원한 안식이며, 시간 속의 제칠일은 영원의 본보기이다”.22 (86.4)
 이와 같이 안식일은 영원의 경험을 열므로써 시간의 파괴적인 흐름에 대한 신경증적인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를 가능케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명한 두 정신분석학자가 안식일 상징주의와 억제 받지 않은 삶 사이의 연관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놀만 오 브라운(Norman O. Brown)은 억압에 대한 논의에서 주장하기를 “억압된 삶은 오직 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억압받지 않은 삶은 무시간이나 영원안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이경험을 “영원의 안식일”23 로 상징화 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료 정신 분석학자인 주스트 미어루(Joest Meerloo)는 브라운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영원함에 대한 인간의 갈망 곧 일상을 넘어서고 시간의 감금을 벗어 나려는 인간의 소원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상징적 행위를 하게 된다. 인간은 그 상징적 행위들에 의하여 저쪽 넘어로 날아 가려하며 영원의 안식안에 있는 억제 받지 않는 방식의 삶을 살고자 한다.”24 (87.1)
 문제는 그 객관화된 시간에 관련된 억압된 삶이 자신에게 닥쳐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각자의 지식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화 되고 억압된 시간으로 부터의 해방, 영원으로의 자유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는 결코 충분히 성취될 수 없다. 브라운은 또 주장하기를 “우리는 모든 행위의 중단 같은 것” 다시 말해서 죽음 같은 것 말고는 “안식” 또는 “영원”같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화해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 자체가 안식이면서 살아있는 활동(생명)인 그런 것의 가능성을 유지해야 한다”25 는 것이다. (87.2)
 그러나 어떻게 이일이 가능할까? 다시 한번 우리는 살아 숨쉬는 안식일 경험이 우리를 자유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다. 현대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갖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의 하나는 현대인들의 생활에 진정한 휴식이 결여되어있다는 점 일 것이다. 성서적 관점으로 볼 때 죽음은 꿈을 꾸지 않는 수면 같은 휴식으로 나타나고 있다.26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에 있어서는 그같은 휴식이 틀림없이 너무나 아득한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회 저술가인 디이즈-알레그리아(Diez-Alegria) 신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쪽’에서 본 죽음 즉 긴박한 초월적 소망없이 바라보는 죽음은 ‘안식일 휴식’‘안식’이나 ‘잠’ 같은 범주에 적합한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 행동주의는 심지어 자신의 휴가까지라도 광란하는 행동의 시간으로 전용함으로써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안식’의 개념을 대부분 상실하고 있다 ∙∙∙ ”27 (87.3)
 노동후의 안식이 죽음에 대한 성서의 견해이다. 죽음이란 삶의 끝에 있는 안식일 휴식이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쉼의 기대는 조용하며 또 깊은 의미에 있어서는 기쁘기 조차한 것이다. 안식일은 그러한 안식의 미리 맛보기이며 시간적 존재를 위한 영원의 시사회 같은 것이다. (88.1)
 오늘날 서구 사회는 신성한 시간의 결핍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7일에 하루씩 안식일을 제대로 준수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금요일을 기다리는 것은 새롭고 열광적인 활동을 위한 주말 약속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미국의 국경일 들은 긴 연휴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연휴를 보내는 사람들 중 그 국경일들이 무엇을 기리는 날들인지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88.2)
 고대의 상징인 안식일은 아직도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을 간직하고 있다. 시간적 존재인 인간은 시작과 영원을 함께 경험하는 사회를 지탱시켜 줄 자원을 안식일의 재발견에서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88.3)
 미 주
 1. 필자는 이 글에서 “안식일”이란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쉼과 예배의 날로 주어 거룩하게 하신 제칠일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창 2:1-3). 그러나 성경에서 안식일 상징은 제칠일 안식일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만 할 것이다. 성경에는 해마다 일곱 차례의 특별한 안식일 절기들이 있다(레 23장). 또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있다(레 25:1-7). 7차례의 안식년 후인 제 50년은 희년으로 기념되었다(레 25:8-12). 이 글의 중심관심은 한주일의 제7일이지만 다른 안식일들에 나타나는 거룩한 시간의 좀더 큰 상징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1883년에, Wihdm Lotz는 히브리의 안식일(Sabbath)이 매달 제7일, 14일, 28일에 떨어지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금기일(taboo days)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을 했었다(Wihelm Lotz, Questiones de Histonia Sabbati (Lqpag:J. C. Heinrichs, 1883). 근래에 와서 Gerhard von Rad도 안식일이 금기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Gerhard von Rad, “Tte Thelogy of Israel’s Hstaical Traditions,” Old Testament Theology, tans, ty D. M. C. Stalker (New York: Haper Brothers, 1962), vol 1, 16.]. 그러나 Andreasen은 최근에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구약 성경은 안식일을 금기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NielsEnk A. Andreasen, The Old Testament Sabbath: A Traditional-Historical Investigation,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Dissatation Series, Number Seven (Missoula, Montana:university of Montana, 1972), 265.].

 그리고 구약성경의 “안식일 구절들은 아직도 그 신학적인 중요성이 대부분 밝혀지지 않은 채 있다”고 한탄하였다(p. 273). 그리고 David tracy가 옳게 지적했듯이 기독교 신학자들은 안식일의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David Tracy, A Blessed Rage for Order: The New Pluralism Theology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5), 77, 78.].

 3. Herbert W. Richardson, Toward an American Theology (New York: Haper and Row, 1967), 119.

 4. Genesis 2:3.

 5. Matitiahu Tsevat, “The Base Meaning of the Biblical Sabbath,” Zeitschrift fü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84 (1972), 454.

 6. Kenneth Burke, The Rhetonic of Religion: Studies in Logology (Berkl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208, 201

 Burke는 두개의 창조 이야기에 들어나 있는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7. Ibid, 20-23

 8. Abraham Joshua Heschel, “The Sabath: Its Jvfeaning for Modem Man,” The Earth Is the Lord’s and the Sabbath (New York: Harper and Row, 1966), 15.

 9. Ibid, 5.

 10. Ibid, 21.

 11. Exodus 31:14-16 cf Numbas 15:32-36.

 12. Miroea Elide, 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 trans, by Wilard R. Trask (New York: Pantheon Boooks, 1954), 21.

 13. Ibid, 23.

 14. Miroea Eliade, Myth and Reality (New York:Harper and Row, 1963), 87, 88. cf The Sacred and the Profene: The Nature of Religion, trans, bt Wilard R Trask (New York: Harcourt, Braoe and World, 1959), 81 ff.

 15. Heschel, “Tte Sabbath,” 51.

 16. Exodus 20:8, 11.

 17. Edmund Husserl, The Phenominology of Internal Time-Consciousness, trans by James S. Churchill (Bloomington, Indiana: Indiana Univasity Press, 1964), 23.

 18. G. van der Leeuw, Religion in Essence and Manifestation, by J. E. Turn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3), vol 2, 385.

 19. Jean Piaget, Tlie Child’s Conception of Time, trans, by A. J. P&naans (New York: Basic Book, 1969).

 20. Gehard vai Rad, “The Theology of Israel’s PnPhetic Traditions,”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by D. M. G. Stalker (Edinburgh: Oliver and Boyd, 1965), vol 2, 99, 100.

 21. Ecclesiates 3:1

 22. Heschel, “The Sabbath,” 74.

 23. Norman O. Brown, Life Against Death: The Psychoanalytical Meaning of History (Middletown, Conn.: Wesleyan University Press), 93-95.

 24. Joost A, M. Meeeloo, Along the Fourth Dimension: Man’s Sense of Time and History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1970), 55.

 25. Brown, Life Against Death, 95.

 26. 1 Kings 2:10; 2 Chron. 21:1; Eccl. 9:5, 6: Matt 9:24; 1 Cor. 15:51, 52; 1 These. 4:13-17.

 27. Jose Maria Dies-Alegria, I Believe in Hope (Garden City, New York:Doubleday, 1974), 186. (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