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9. 영원의 순간 (Gerald winslow)
 * Walla Walla College 신학교수. 저서: Justice Triag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1.1)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제정 되었다.—예수님
(81.2)
 시간의 흐름만큼 인간의 지배를 덜 받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임신이나 출산의 순간을 미리 정하지 못했다. 또 우리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죽을 시간을 미리 정할 수가 없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서 인간적 노력이 이룩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틀림없이 파멸 될 것이라는 인식이 발전한다. 인간의 자기 과신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행위들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그러나 안식일이라고 하는 하나의 오래된 상징은 안식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다. (81.3)
 먼저 안식일의 상징적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1 그러나 이 글에서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시초와 영원의 상징적 표현이 됨으로써 인간의 시간 경험을 얼마나 풍요케 할 수 있느냐 하는 점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안식일에 관하여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우선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속에 있는 우리의 생존과 그 시작과 존속의 깊이를 섭리의 빛 가운데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너무나 독특하게 잘 조합된 상징이다. (81.4)
 — 기원 —
 학자들은 안식일의 기원에 대하여 의견이 많을 것이다.2 그러나 이 글에서의 관심사는 안식일의 기원이 아니라 기원 자체의 상징으로서의 안식일이다. 신학자 허버트 리차드손(Herbert Richardson)은 “사상의 기원이 그 타당성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의 진실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 라고 하였다. 안식일에 관한 진실은 “태초에 하나님이 ∙∙∙ ”라는 말과 함께 시작한다. 창조의 이야기 속에 창조의 기간의 절정을 이룬 그날을 7일 주기로 맞이 하도록 제정된 안식일은 창조 사건을 위하여 시간속에 설정한 영구적인 상징으로 서 있다. 그 이야기는 부연적인 설명 없이 매우 단순하게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4 (82.1)
 안식일 관련의 초창기 문서들에서는 안식일 제정에 대한 이유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세계를 창조하신 권세를 가지신 대주재 하나님께서 안식일도 제정하셨다고 말할 뿐이다. 한 학자의 논평을 들어보자: (82.2)
성경의 초기 율법에서는 좀처럼 이유들을 찾아 보기 힘들며 이론은 더 찾아 보기 힘들다. 안식일의 사상을 언어로 나타내는 일은 성경의 정상적인 범위와 성경을 벗어난다. 그러나 안식일의 중요성과 성경의 그 빈번한 언급은 옛적부터 이론적 설명의 필요성을 제기해왔다.5
(82.3)
 이처럼 부가적 이유들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후기의 성경기자들이 불가피하게 안식일에 대한 좀 더 설명조의 기술들을 많이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형태에서의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주권의 수용을 상징한다. (82.4)
 켄네드 버크(Kenneth Burke)는 하나님이 제칠일을 안식일로 제정하시고 난후에야 창조의 이야기 속의 “주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6 창조주는 통치주이시다. 상징적으론 안식일은 인간을 이같은 주권자의 질서 아래두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강조는 처음부터 나온다. 버크는 말하기를 안식일은 “양극적인 용어”라 한다. 즉 안식일은 서로 대립하는 쉼과 노동의 이야기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식일은 노동하는 6일의 논리적 정반대의 자리에 있다. 안식일은 그 노동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도덕적인 “아니요”가 된다. 그날은 창조의 6일에 대하여 정반대이기 때문에 부정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82.5)
 버크의 분석에서는 이 도덕적 “아니오”가 무의 관념에 선행하고 무의 관념을 유도하고 있다.7 달리 말하면 이 도덕적 부정이 어떤 특정의 사물이 전혀 아닌 신적 존재의 개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아니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 나마 권위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노동의 중단을 통하여 모든 특정 사물들을 초월하시는 분의 주권을 받아들인다. 랍비 헤셀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어떤면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83.1)
실로 그날의 광채는 자제라는 표현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고 오직 그분이 어떤 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의 범주에서 하나님의 신비가 더 적절하게 부정의 방식(Via negationis)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8
(83.2)
 하나님의 비물체성(nmthng-ness)을 나타냄에 있어서 안식일보다 더 효과적인 상징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헤셀은 말하기를 “물체는 우리의 마음속에 무겁게 드러누워 우리의 모든 사상을 압제하는 범주”9 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체가 아니라 영이시다 이점이야말로 고대나 근래의 유물론자들이 알아야 할 교훈이다. 어떤 물체를 신격화 함으로써 상징들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물체화 될 수 있다. 안식일의 경험인 거룩한 시간은 그같은 우상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안식일은 인간을 영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헤셀이 말했듯이 “안식일은 창조에 앞섰으며 창조를 완성했다..이 세계가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그 영의 모든 것이다”.10 (83.3)
 이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안식일이 창조주의 통치권이 범죄로 말미암아 도전 받기 이전 즉 노아 홍수에 앞서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버크는 무질서가 질서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의하여 상징화된 주권의 질서는 조만간에 배척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니다”에 대해 아니요라는 반항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의 무질서는 죽음으로 나아갔다. 물론 불순종이 안식일 범법자에게 극형을 가져왔다는 것은 진실이다.11 그러나 버크는 창조의 이야기에서 안식일이 죄와 죽음이 나타나기 이전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이야기에서 안식일에 내포된 질서가 불가피하게 범죄를 이끌었다는 암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홍수전에 얼마나 많은 완전한 안식일이 지나갔는지에 대한 암시도 없다. 죄가 들어오기 전인 태초에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보낸 최초의 만 하루는 안식일이었다. (83.4)
 죄가 생기고 나서부터 안식일은 저 에덴적 경험의 얼마를 되찾는 수단이 되어왔다. 미르시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주장하기를 “모든 예식은 신적인 모델 즉 원형을 가지고 있다”12 고 하였다. 후에 그는 또 “유대—기독교의 안식일도 하나의 신(神)의 모방(imitatio dei)이다. 안식일 안식은 주 하나님의 최초의 동작을 재연한다”13고 말했다. 이 원형적 행위의 주기적 반복은 천국 상태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들어내고 있다. 그 에덴의 상황은 “옛날”에 상실 되었으며 그리고 각 개인의 경험에서 다시 상실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쇠퇴와 파멸과 죄책을 가져온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다른데서 말했듯이 시대를 달리하고 문화를 바꾸면서도 시간에 관한 인간의 행위가 어떤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현상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행위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일을 치유키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서’ 그 다음에 ‘세계의 시작’을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14 기원으로 돌아가는 이 “여행”은 소생과 갱생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실존의 태고적 뿌리에 접하게 되고 이로써 또 하나의 “탄생”이 가능케 된다. (84.1)
 태초의 주기적인 재 발견은 꼭 개인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종교는 현저하게 사회적 현상이다. 심지어는 개인적인 종교라 할지라도 그 대부분은 대체로 한 집단의 공동체적 신앙의 변형에 불과한 경우들이다. 안식일의 경우에도 그렇다. 안식일은 개인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극도로 사회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최초의 안식일도 홀로 기념되지 않았다. (84.2)
 공동체는 기원을 기념하고자 할 때, 그리고 집단의 필요를 예식을 통해 재현하고자 할 때 거룩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안식일은 공동체에게 “우리”의 기쁨을 위한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랍비 헤셀은 다음과 같은 고대의 알레고리를 인용하고 있다. (84.3)
창조의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에 제칠일이 간청했다. 우주의 주재시여, 당신이 창조하신 것들은 모두 쌍쌍입니다. 주일의 모든 날들에게도 당신은 짝을 주었습니다. 단지 저만 외톨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너의 짝이 되리라.15
(84.4)
 안식일은 그 다음으로 기억 즉 상상력이 넘치는 회상을 요구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16 개인과 공동체의 생명은 많은 시작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좀 더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생명은 결코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다른 생명의 선물이다. 안식일 거룩의 경험을 통하여 사람들은 창조주와 창조에 재결합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와 자기 자신들에게도 재결합될 수 있다. 사람들은 생명의 선물의 숭고함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거룩한 시간의 기념을 통하여 삶에 끼치는 시간의 영향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게 된다. (85.1)
 — 영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