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6장 마지막 때에 있을 바벨론의 멸망
 고대의 바벨론에 일어났던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 시대의 악과 그 지지자들의 운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바벨론의 붕괴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고 자기 백성들을 핍박하는 모든 세력을 처치하실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바벨론의 멸망의 메시지는 많은 위로를 주는 기별이 된다. (110.1)
 역사는 이(멸망) 예고가 맞아떨어졌음을 가리키는가? 다니엘 5장이 보여 주듯이 바벹론은 갑자기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멸망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그 멸망의 양태를 역사의 끝에 있을 바벨론의 미래적 붕괴를 예시해 주는 한 모형으로 추켜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110.2)
 고대 바벨론의 멸망이 내포한 모형론적인 속성에 따라 예언상에서도 모든 국면이 역사에서 실제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멸망과 구원에 관한 옛 예언들의 부분적 성취가, 마지막 날에 더 큰 메시야적 성취에 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확신시키는 더 높은 목적의 역할을 한다. 구두 예고와 그 최초 혹은 부분적인 성취가 강조하는 바는 “사단의 왕국은 패배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구히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 메시지가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히브리 예언들은 메시야가 세계를 통치할 때까지 고색창연한 것이 되었다고 결코 볼 수 없다. (110.3)
 우주적 표징들을 띤 야훼의 묵시문학적인 날은 메대와 바사에 의하여 바벨론이 타도될 동안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의 운명에 관하여 언급한 히브리 예고들에 나오는 묵시문학적 특징은 그러한 전쟁 신탁들 속에 이중적 전망, 즉 단기적인 지역적 성취와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규모로 장기간의 묵시문학적인 완성이 있음을 드러내 준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이스라엘의 고대 예언들에는 본질적으로 이미 이 모형론적인 전망 구조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사야는 시적 과장법 이상으로 앞으로 임할 바벨론의 붕괴를 “야훼의 날”(사 13:6. 예루살렘 성경)과 “맹렬히 노하는 날”(13절)로서 묘사하였다. 바벨론은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될 것이다(19, 20절; 참조. 렘 50:46). 그날에 해와 달과 별들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다(사 13:10).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할” 것이다(11절; 참조. 렘 51:47-49). (110.4)
 이 모든 우주적 세계적 국면들이 주전 539년의 고대 바벨론의 멸망에서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고대의 모든 예언들이 완전하게 모두 다 성취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보증한다. 실체(antitype)는 항상 모형보다 크다. 과거의 이스라엘과 바벨론 그리고 유브라데 강의 마름을 그 미래에 있을 실체적 성취로 해석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와 있는 모형론적인 열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언약의 모형론적인 본질에 관한 뚜렷한 실례는 다음의 보증에 나온다. (11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렘 50:20).
(111.2)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위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약속인가! 이 구절은 이미 진술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약속(렘 31:31-34; 겔 36:26-28을 보라)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무척이나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스 1:5). (112.1)
 그렇지만 돌아온 남은 자들에게서 이 약속의 성취가 시작되었다해도 그것은 분명히 새 언약의 충만하고 완전한 영광이 아니다. 메시야께서 친히 희생의 피를 흘림으로써, 용서하고 정결케 하는 은혜의 능력으로써, 이 새 언약을 완성해야만 했기 때문이다(마 26:26-28; 눅 22:20을 보라). (112.2)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게끔 한다는 것과 메시야적인 이스라엘이 그 죄사함의 경험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종말적인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새 언약의 시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언약이 그분 안에 있다. 그분의 초림으로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말한 말세가 시작되었다(행 2:16, 17욜 2:28을 보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로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새 언약의 더 영광스러운, 묵시문학적 완성에 관한 약속이 남아있다. 구약학자인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는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 담겨져 있는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성취 간의 긴장관계를 표현하였다. (112.3)
그러므로 현존 시간대와 성취의 날까지 우리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에게 약속된 용서로 인해 우리 각 사람은 매일 아침 세상과, 자신과 그리고 새 언약의 방향안에서 성취된 것과 우리 자신과 이스라엘에서 이끌어낸 공동체와 열방들을 위해 완성된 것 사이의 긴장 안에서 새로이 시각하도록 허용되는 것에 대해 크게 놀라게 된다.3)
(112.4)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용서하시겠다고 한 약속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엑소더스 하자마자 곧바로 효력을 발휘하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확고히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인 마지막 때에야만이 충만하고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113.1)
 바벨론의 멸망이 함축하고 있는 모형론적인 면을 살펴보자. 이미 진술하였듯이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바벨론은 바사의 장군 고레스가 유브라데 강의 수심이 가장 낮을 때인 티스리(Tishri. 9-10월) 16일에 북쪽에서 들어오는 물줄기를 근처의 호수로 갑자기 바꾸어서 자기 병사들이 마른 강바닥을 통하여 바벨론에 들어가도록 하였을 때에 일차적으로 함락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한 묵시문학적인 표징들이나 표시들 없이 주전 539년에 바벨론의 예상치 못한 항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최초 성취는 메시야적 시대와 연관된 갱신된 약속의 보증 역할을 한다. (113.2)
 사도들 당시에 로마의 가이사들 형태의 새로운 “바벨론”이 그리스도의 최고 주권을 반대하였다(벧전 5:13을 보라). 요한계시록은 고대의 예루살렘이 야훼로부터 멀어져간 것처럼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점차적으로 저버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을 “음녀” 창기로 불렀듯이 요한계시록도 신실하지 않은 그리스도 교회를 음녀라고 부른다(겔 16:15; 사 1:21; 계 17:1, 18). (113.3)
 또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몸 혹은 영적 교회는 결코 굴복당하지 않는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다(마 16:18; 24:24).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인 신실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새로운 엑소더스 운동을 통하여 배도하고 억압하는 교회一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一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발씀은 “광야”에서 그 신실한 교회가 살아있도록 지킬 것이고 파멸시키는 물로 살육당하는 것에서부터 교회를 보호해 줄 것이다. (113.4)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114.1)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계 12:6-16).
(114.2)
 그렇지만 기독교 시대의 클라이맥스는 그리스도의 남은 백성들에 대적하여 벌이는 세계 전쟁일 것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17절). (114.3)
 이 최종적이고 전체적인 전쟁은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실 때에 “아마겟돈”이 될 것이다. (114.4)
 6. 고대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
 성경이 미래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바벨론이 함락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현대 바벨론의 멸망은 그 역사적 모형에 예시 및 전조되어 있었다. 그렇시만 모형과 실체(antitype)가 인종적이고 지리적인 측면에 있어서 똑같아야 한다고 추정하면 성경 모형론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모형론에 있어서 메시야적인 실체 사건들은 항상 그 히브리 모형들보다도 더 크다. 여기에서 상응성은 신학적으로 핵심적인 것, 즉 야훼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언약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다윗과 그리스도는 둘 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다윗의 왕권보다 무한대로 더 크다. 다윗의 왕국은 소규모의 불완전한 방법으로 메시야 왕국을 예시하였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 모든 영광과 지혜에 있어서 솔로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뛰어나다(마 12:41, 42을 보라). (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