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6장 마지막 때에 있을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에서 빌려온 영상적 표현들을 재치있게 모자이크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 책의 신학적인 메시지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요한계시록의 첫 이상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는 “일곱 금 촛대” 사이에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서 계셨다”(계 1:12, 13). 그리스도께서 세계 교회를 위하여 부활하신 후에 행하시는 활동에 대한 이 상징적인 묘사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와 그 히브리 성소 봉사로부터 끌어낸 것이었다. 메시지는 명료하다. 예수는 자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참 어린양으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계 1:5),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한 분이고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히브리인들의 성막과 그 제의(祭儀)가 예언적 모형들 안에 전조(前北)되어 있는 것을 사실적인 실재로 성취시키신다. (99.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희생 제사와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을 메시야적으로 성취하셨다는 중대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고로 바울은 히브리서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노련한 한마디의 말로 선포한다. “전 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더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8, 19). (99.2)
 어린양이시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새로이 나아간 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창조이다.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 1:6). 모세의 지도하에 있던 12지파라 불리워진, 모든 이스라엘인 마다 각자 구속자인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이고, 각자가 주께 직접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하는 “제사장 나라”(출 19:6)는 이제 그리스도의 12사도의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 종족으로부터 새 메시야적 이스라엘로의 전환은 참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참 대제사장이고 왕이신 메시야인 이의 부활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과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세계교회와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불리워진 새 노래의 주제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과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 5:10). (100.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얼마나 높은 영예와 큰 책임을 주셨는가! 이 약속은 사도 교회를 위로해 주고 고무해 주었다. 사도 교회는 이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핍박을 견뎌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한 주장은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을 거절함으로(고후 4:4 참조)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의 대적이 되었기 때문이다(계 2:9; 3:9을 보라).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마 3:9; 요 8:33-34). 교회사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의 성취를 뜻하고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한 하나님에 의한 영감으로 되어, 이 둘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 하나의 점진적인 계시를 이루고 있다(히 1:1.2을 보라). (100.2)
 하늘 성소의 일곱 금 촛대는 더 이상 이스라엘 종족을 세계의 영적 빛으로서 나타내지 않는다(슥 4:1-14; 계 1:13).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이스라엘의 촛대들은 오늘날 세계 교회를 상징한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몸소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설명하여 주셨다(계 1:20). 히브리인들의 영상적 표현이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 높여져 기독교적인 “비밀” 혹은 상징이 된 또 다른 실례가 이 이상에 나타난다. 즉 “그(그리스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16절)라고 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천사들과 참 지도자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별” 은유를 사용하였다(단 8:10:12:3).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 ∙∙∙ 이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라고 하였다(계 1:20). 그리스도는 여기서 요한계시록 전체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영상적 표현을, 그리스도와 자신의 백성에게 적용하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야훼의 옛 언약의 백성들이 지닌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서 계속된다. (101.1)
 그러나 히브리 명칭들과 지리적인 위치들을 다시 그 옛 언약의 제한에 따라 해석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금한다. 요한이 사용한 히브리 영상적 표현들과 명칭들一종족적이든지 지리적이든지 간에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만 오직 유효하였던 옛 언약에 다시 빠지는 것이 된다. 고로 문자주의는 이스라엘의 예언을 신약성경 시대에 적용함에 있어서 십자가와 메시야 예수의 부활의 결정적인 역할을 부인한다. 이스라엘의 예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一사도 교회一에게 적용한다(롬 11:17-24). (101.2)
 1. 인자가 하나님과 하나됨
 혹자는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주된 자료 원천을 구약성경으로 보고 이 구약성경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의 의미들을 발견하는 돌파구에로의 첫번째 발걸음이 된다”고 보고 있다.1) (102.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됨을 선언한 것을, 요한의 묵시록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로부터 취하여 온갖 색상들로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계 1:7, 14-16; 단 7:9; 10:5, 6; 겔 43:2). 요한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에게 야훼의 다양한 특색들을 적용하고 있다. (102.2)
 우리가 실제로 요한계시록이 부활하신 주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1:8, 17)고 말씀하셨다고 기술한 것보다 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거룩한 절대자에 대한 그러한 명칭은 전능자에게만 속한 것이다(사 44:6; 4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됨에 대한 이 영광스러운 묘사가 주는 실천적인 교훈은, 그리스도가 야훼께서 고대에 하신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102.3)
 2. 새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성경의 마지막 책은 신약성경의 극치이다. 그 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義)를 그 두 가지 측면, 구원적이고 형벌적인 측면에서 집행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여 준다. 이 복음의 원칙과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배도와 부흥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고대사에 있었던 사건들을 모형들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계 2:14-17)라고 권고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고대의 저주와 축복의 영상적 표현을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론적인 근거는 명확하다. 그 두 백성이 동일한 언약의 하나님에게 속하는바, 그는 예언상의 메시야로서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셨다. (102.4)
 두아디라에 있는 또 다른 사도 교회에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20절)라는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주어졌다. “여자 이세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교 제사장의 딸이었던 이세벨과 결혼한 아합 왕 치하의 이스라엘 역사를 상기하여야만 한다. 구약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하였을 때에만 이세벨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이세벨의 배도에 내포된 본질을 두아디라 교회에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일치성은 우연이 아니라 모형론적인 관계성을 제시한다. 즉 이스라엘의 이세벨은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이세벨”에 대한 예언적인 예표가 되었다. 고대의 이세벨이 야훼의 이스라엘을 속이고 핍박한 반면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세벨은 자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종들을 속이고 억압한다(고후 11:13-15). 이세벨은 자신이 “여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종교적 진리와 도덕적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이 위조한 그리스도교로 오류와 배도를 가르친다. (103.1)
 서로 대립하고 있는 참된 기독교와 거짓 기독교라는 주제, 즉 계시록의 그 이후 장들에서 순결한 여인(계 12장)과 음녀(계 17장) 혹은 예루살렘과 바벨론(계 17-18장; 21장)이라는 대조되는 상징을 통하여 더윽더 발전되어진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 대조되는 상관 관계는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일관적인 패턴이다. 루이스 위어는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에서 오직 예루살렘의 반대 세력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고 말한다.2) 고로 우리는 바벨론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시온에 대한 적대 세력으로서 정의하여야만 한다. (103.2)
 3. 바벨론의 본질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마지막 일곱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바벨론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들을 대적한 태도를 조사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바벨론의 시작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킨 한 도시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 도시의 거주민들은 “하늘에 닿게끔” 탑을 세웠다(창 11:4). 아마도 이것은 또 다른 홍수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럼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행하신 약속을 무시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당하였다(9절). 바벨은 자기 행위와 계획으로 구원받고자 한 원리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였다. (104.1)
 수세기 후에 신바벨론 제국의 왕인 느부갓네살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땅을 침락하였으며 솔로몬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오직 그루터기만 남도록 잘리운 거대한 나무에 대한 불길한 꿈을 보여주셨는지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의 왕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뽐내면서 그 메시지를 방약무인(傍君無人)하게 무시하였다(단 4:30). 이에 따른 하나님의 판결은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는 것이었다(31절). (104.2)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벨사살은 이스라엘의 성전에 있었던 신성한 기명들을 자신의 왕실 연회에 사용함으로써 더럽혔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메시지는 왕궁 벽에 암호 형태로 쓰여졌다. 이 메시지는 다니엘의 의하여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고” 그리하여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단 5:27, 28). (105.1)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사실상 느부갓네살 왕이 스스로 높이는 일을 반복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였나이다”(22, 23절). (105.2)
 바벨론의 본질적인 특성은 분명하다. 바벨론은 이스라엘과 언약의 하나님, 이 둘 다의 대적이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신성한 성전에 나타난 구원하는 은혜의 진리를 거부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였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미래 모습에 계속되어질, 특히 마지막 때 그 묵시록적 실체 가운데서 종교적 모형으로서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특성이다. (105.3)